제 10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
여기서부터 제 1권 나머지 부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주를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구속자 하나님에 관해서는 제 2권에서 설명할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선하심과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그의 의지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반복적으로 예찬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은 관용을 베풀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자들이 계속해서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 징벌하시는 의로운 심판장이심을 나타내시기도 한다.
2.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들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하나님의 특성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마치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출애굽기 34:6-7에서는 두 번 반복된 그 장엄한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이 선언된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에 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산 경험으로 되는 것이지 공허하며 과장된 사색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시편 145편을 통해서도 그러한 실례를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험이라고 하는 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셨다(렘924); 참조, 고전1:31). 특히 이 세가지는 꼭 알아야 할 것들이다. 첫째는 인애로서, 우리의 모든 구원은 전적으로 여기에만 달려 있다. 둘째는 공평 혹은 심판(judgement)으로, 이것은 날마다 행악자들에게 시행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다 가혹한 저들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기다린다. 셋째는 정직 혹은 의(義, Justice)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또한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게 된다.
실로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 무결한 생활과 거짓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배우게 된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으므로 우상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실로, 우리를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경은 이교도의 모든 신들을 명백히 배척하며 거절하고 있음을 독자는 우선적으로 주의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종교는 일반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유일신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서나 알려졌으며 또한 존경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까지도 본래의 진정한 감정으로 말할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유일성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들 자신의 허망한 생각에 의해 한결같이 거짓된 허구에 끌려 들었거나 빠져들어감으로써 그 지각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지각하던 것은 다만 그들을 핑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하바국은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명하였다(합2;20).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신자로 하여금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다른 신도 용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제 11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예배에서의 형상<形像>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1-4)
1. 하나님은 가시적(可視的)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하신다.
성경 어디서나 보게 되는 그 독특한 정의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일체의 신성을 무(無)로 돌려 버린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하여 유일하며 참된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0:4을 통해, 자기를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우리의 방자한 행동을 억제시키셨다. 하나님은 우상들을 마치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거나 한 것처럼 서로 비교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미신 숭배주자들이 하나님을 그들 가까이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일체의 형상, 화상(畵像) 그리고 그 밖의 상징물들을 예외 없이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인간이 세운 조상(彫像)과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그린 화상(畵像)은 모두가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 뿐이다(신4:15-18; 사40:18-20, 41:7, 29, 45:9, 46:5-7; 행17:29). 어거스틴은 세나카의 불평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가장 천한 물질을 사용하였다. 어떤이들은 그 신들에게 인간의 형태를, 어떤이들은 야수의 형태를 입혔으며, 또 어떤이들은 남녀 혼성의 형태로, 어떤이들은 몇 개의 다른 몸으로 그 형태를 입히고 그것들을 신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런 것들이 생기(生氣)라도 얻어서 우리와 마주치게 된다면, 아마 괴물로 여겨질 것이다.”
3. 신적(神的)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도 형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실로 하나님은 결정적 표징에 의해서 때때로 자신의 신적 위엄의 임재를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대면하여” 보이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출33:11). 그러나 그가 지난날에 보이셨던 그 모든 표징들은 모두 다 인간의 교육을 위해서 적절히 고려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불가해한 본질을 인간에게 명백하게 말해 주는 것들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실 것에 대한 서곡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로 신격(神格)의 상징을 세우려고 하는 어떠한 구실도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4. 형상과 화상(畵像)은 다같이 성경과 반대된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 있다(시135:11; 참조, 115:4). 여기서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해력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언어로 미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상은 “자기(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사2:8, 31:7, 37:19; 호14:3; 미5:13). 이 말씀으로 보아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형태는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확립된다. 또한 화상도 조상(彫像) 못지 않게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조각가가 그를 위하여 어떤 조상을 세우는 것뿐 아니라, 예술가가 어떠한 것도 조형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는 그와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거짓이요, 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오류를 논박함, 5-7)
5. 우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하는 옛 속담은 바로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라”(렘10:8)고 하였으며, 하박국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합2:18)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것이다.
6. 교회의 교리도 우상에 대하여 달리 판단한다.
이 외에도 락틴타우스(Lactantius)와 유세비우스(Eusebius)도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가사적(可死的)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주장하였다. 어거스틴도 형상에게 예배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형상)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둘째로, 형상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 이외의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형상물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하는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게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그 의무를 다했더라면 무식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전파와 성례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눈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해서 마음의 주의를 성실하게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하여 다만 우상 이외에서는 배울 수 없다고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무식자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바로 주님의 제자들, 구원의 신비로 교육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책”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ㅇ낳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을 교육하기에 적합했던 그 교리를 탈취당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임무를 우상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과 예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 8-16)
8. 형상의 기원: 유형적인 신격(神格)에 대한 인간의 욕구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을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사자상(死者像)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창31:19).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은 말하자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공장(工場)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한 것으로 꽉 차 있어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해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에 완전히 젖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악에는 다시 새로운 악이 함께 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수공(手工)으로 표현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이스라엘은 실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국행진(故國行進)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하였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이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물들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어 왔다.
9.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
이런 종류의 공상에는 즉시 예배가 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형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하게 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나 어떤 피조물을 상(像)으로 표현하여, 이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꿇어 엎드릴 때에는, 벌써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로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떠한 봉헌도 금하셨던 것이다(출20:25). 같은 이유에서 역시 제 2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마침내는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우상을 예배하든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든지, 거기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우리는 이방인이 하나님을 나무나 돌로밖에 이해하지 못할 만큼 우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우상을 바꾸기는 하였으나 언제나 동일한 신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형상에게 봉헌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신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이 말한 변해서(辨解書)를 읽어보라. 즉 민중들이 우상숭배의 비난을 받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한 것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형상물 속에 보이지 않게 내주하는 한 실재라고 답변하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소위 “순수한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우상이나 그 우상에 의해서 표현된 영(靈)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하여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의 한 기호(記號)를 바라보았을 뿐이라고 진술하였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형상물을 통하여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일단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즐겨 만들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새로운 계교에 미혹되어, 마침내는 하나님이 우상을 통하여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재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와 같은 형상으로 예배한다고 확신하였고,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하였다.
10. 교회에서의 형상물 예배
어거스틴은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도 옛날에는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목석(木石)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2:27; 겔6:4이하; 사40:19-20; 합2:18-19; 신32:47).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같이 행해지고 있다.
11.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들은 형상물에게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dulia) 곧 영광이라는 것이 조상(彫像)이나 화상(畵像)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그러나 나는 절대로 어떠한 상(像)도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까닭에, 이 양자(兩者)를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원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과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주신 이 은사가 불하리하게 남용되거나 우리를 파멸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또한 형상물의 사용이 어떠한 악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도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13. 교리가 순수하고 건전할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을 거절하였다.
첫째로 우리가 만일 초대 교회의 권위에 감동을 받고 있다면 종교가 아주 번창하고, 순수한 교리가 우세하던 약 500년 동안, 기독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형상물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직의 순수성이 점점 쇠퇴하여 감에 따라,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형상들이 소개되었다. 어거스틴은 명백한 어저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즉 형상물을 숭고하고 높은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은 없다 하더라도 생명 있는 지체와 감각 있는 것과 흡사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들이 살아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다시 다른 곳에서 “우상이 수족(手足)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나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우상은 입과 눈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 데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말하지도 못하며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걷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상 예배뿐만 아니라, 우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경고한 이유인 것 같다(요일5:21).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레네 황후의 명령과 그 후원하에 800년 전에 개최된 회의(제 2차 니케아 회의. 787년. 제 7회기)에서 교회당 안에 형상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형상물의 사용을 옹호하는 자들은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창1:27을 통해, 우리가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는 그는 아2:14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 하였다. 어떤 이는 마5:15을 인용해 형상물을 제단 위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고, 시4:6을 인용해 형상들을 우러러 보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면서 시26:8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가장 교묘한 것은 요일1:1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정관(靜觀)함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들의 어리석음이야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생각된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오용(誤用)
그들은 예배에 대해 논할 때에 반드시 야곱이 바로왕을 축복한 것(창47:10),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창47:31; 히11:21)한 것, 야곱이 스스로 세운 돌비에 기름부은 것 등을 들추어 낸다(창28:18). 그러나 이들 중 세 번째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였다(시99:5, 9; 시45:12). 이 여러 구절들은 그들에게는 가장 적절하며 결정적인 구절들로 생각되었다. 만일 누가 형상의 옹호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려고 한다 해도 아마 이 이상 더 그 어리석음을 들 수 있었을까?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무서운 주장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틴의 감독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형상물을 경건하게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는 생명의 원천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예배와 영예를 이 형상물에게 드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도나 마르키온파와 동류로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합심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실로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이에 열중한 나머지, 형상 예배를 거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도시에 매음굴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만장일치로,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는 형상 반대주자들이 더 나쁘다고 결정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이 소극(笑劇)이 박수 갈채 없이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한 문구를 첨가하였다. 곧 “그리스도 상(像)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는 구절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속이려고 사용한 라트리아(la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봉사)의 구별은 어디에 있는가? 이 회의는 예외 없이 형상물을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다루고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