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장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 1-6)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실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인 상상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은 하나님을 육체적인 존재로 상상하였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을 입, 귀, 눈, 손, 바과 같은 것들을 가지신 분으로 자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방식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미약한 수용 능력에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높은 위엄에서 훨씬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해 또 다른 특성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홀로 한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떠돌 뿐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essence)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 그러나 성부는 비록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있어서는 구별되었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hypostasis)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히1:3)시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로 인해 성자 안에 있는 바로 그 본체가 성부 안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에서 성자에게도 본체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자와 성부를 구별시켜 준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론은 성령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성령을 성부와 구별된 분으로 생각해야 하며, 이것은 본질의 구별이 아니다. 본질을 다양화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께는 세 본체가 있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은 이 말을 “위”(位, person)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말을 직역하면 “실재”(subsistence)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는 희랍의 교부들도 사용했는데 그들은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얼굴)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희랍의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은 비록 용어상으로는 어떤 차이점이 있었겠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위”(位)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주는 말이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을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한결같이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어떤 표준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을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들 용어가 새로운 것이라 하여 비난한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진리의 빛을 무가치하게 만든 자로 정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그 용어를 그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패주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재에서 부패한 교의(敎義)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석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그 숨은 장소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호모우시오스- homoousios-동일 본질)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 본질)이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만일 저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더라면, 저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단순한 용어가 바로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와의 사이를 구별지은 것이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벨리우스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거절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회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혹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자.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잡혀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가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런 간계 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동안의 숱한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저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의미
나는 이제 용어에 대한 논의는 그만 두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내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뜻하는 말이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 언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에 못지 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특성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위{位, person. 헬라:본체(hypostasis), 라틴:실체(substance), 실재(subsistance)}.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는 구별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 homoousios)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삼위로 구별되기에,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시다.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용어들은 성경의 지지를 받는 것이며(히1:3; 요1:1),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단자들의 거짓된 교설로부터 보호해준다.
(성자의 영원한 신격<神格>, 7-13)
7. 말씀의 신격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영원하신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던 까닭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매개자로 제시함으로써 이를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창 1장). 남의 허물을 찾기를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말씀”은 명령이나 계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쉽게 피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보다 훌륭한 해석가들인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2-3).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統轄)하였다고 소개한다(잠 8:22).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성부와 더불어 계속 일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모세가 간단히 언급한 것을 한층 더 명확하게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여금 창조 사역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이 사역을 양자(兩者)의 공유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요한은 이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분명하게 말하였는데 곧 “말씀”을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동시에 만물의 원인이시며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요 1:1-3).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불리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계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말씀은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8. 말씀의 영원성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3)고 말씀하신 그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그러나 말씀은 벌써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고 결론지으려 한다. 얼마나 오래 전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시작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요 17:5).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벌써 “태초에…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1)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토록 그와 더불어 존재한신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써 그의 영원성과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은 확증이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바로 그 말씀이시라는 사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인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소개한다.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의 특징적인 표지인 지상대권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아주 분명하게 공표하였고(사 9:6), 예레미야는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 23:5-6)고 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우리는 유일하신 성자만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주지 아니하리라”(사 42:8)고 선언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 결론 내린다.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에 “여호와”라는 명칭을 붙였고(출 17:15), 에스겔도 새 예루살렘 성에 이 명칭을 붙였다(겔 48:35). 제단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올리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적용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예레미야는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16)고 하는 구절에서 위와 똑같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예루살렘에 적용하였다. 이 증거는 우리가 옹호하고 있는 진리를 더욱 지지해준다. 왜냐하면 이 예언자가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오, 의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였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이것을 명백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구절에서는 의의 원인과 원천이 설명되었고, 나중 구절에서는 의의 결과가 첨가된 것이다.
10.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사
거룩한 조상들에게 나타난 어떤 천사는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삿 6:11, 12, 20, 21, 22, 7:5, 9). 만일 이것이 천사의 임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난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으로서의 천사는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천사는 식물(食物)을 먹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삿 13:16). 실로 이 사실은 그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입증한다(삿 13:20). 그러므로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들이 본 것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욱이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18)라는 천사의 대답이 모든 의심을 제거해 주고 있다.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아브라함이나 그 밖의 족장들에게 나타난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그때 벌써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올바르고 지혜롭게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직은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기 위하여 이를테면 중재자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해 그 분은 천사라는 칭호로 불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지속하셨던 것이다(참고, 호 12:5). 거룩한 족장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창 32:30)라고 고백하였는데 이 고백은, 그가 창조된 천사가 아니라, 그 안에 신성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분(골 2:9)이라는 것을 충분히 밝혀 주고 있다. 이사야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말씀이 바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어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하고 충분한 말씀은,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말 3:1)라고 예언된 말라기서의 구절이다. 확실히 성전은 유일하시며 지고하신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그런데 예언자는 성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항상 경배하였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11.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사도들의 증거
신약성경에는 수많은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첫째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된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던가, 혹은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사도의 교훈이다. 바울은 “사8:14”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롬 9:32-33). 이와 비슷하게 “롬 14:10-11”에서 “사45:23”을 인용하여,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이 말씀을 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말씀을 자신 안에서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여기에서 그가 바로 그 영광이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엡 4:28”에서는 “시 68:18”을 인용하여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현현(顯現)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요한은 이사야의 환상을 통하여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증거하였다(요 12:41; 사 6:1). 그 외에도 “히 1:10”은 “시 101:26”을, “히 1:6”은 “시 96:7”의 성취로 보며 그리스도께 적용한 것은 결코 남용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이라고 불러 공개적으로 그의 신성을 주장하였는데, 그가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홀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받아야 할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딤전 1:17). 그래서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 2:6-7)라 하고, 요한은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 5:20)고 말하였다. 더욱이 바울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고전 8:5-6)라고 하며,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고 하는 말씀을 듣는다. 도마도 그리스도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그 분이 바로 자기가 항상 예배드리던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그 신성(神性)을 판단한다면, 한층 더 그리스도의 신성은 명백해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 이제까지 일하신다(요 5:17).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만물을 지배하신 것들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만 속하는 일들이다(히 1:3).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죄를 사하는 자임을 예언하였고(사 43:25), 그리스도는 이적을 통해 이를 증명하셨다(마 9: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죄하시는 일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죄권을 소유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이 권능은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결코 옮겨질 수 없다.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살피시고 꿰뚫어 보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그리스도 역시 이 권능을 소유하고 계셨다(마 9:4; 요 2:25).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결론 짓게 된다.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하여 입증된다.
예언자나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베푸신 이적과 똑같거나 그와 비슷한 이적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어 준 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이적은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적과 그리스도의 이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대, 성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가끔 기도를 하셨다(요 11:41).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님 자신의 권능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마 10:8; 막 3:15, 6:7).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하였다. 그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신성을 가장 완전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다(요 5:36, 10:37, 14:11).
더욱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의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소유하신다고 하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 확실하다. 나는 그리스도를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과 의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마 19:17). 복음서 기자의 증언에 따라 창조의 시초부터 생명과 빛이 존재하였다는 것을(요 1:4) 신뢰하기에, 감히 우리의 신앙과 소망을 그에게 두는 것이다.
신앙에서 나오는 기도는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이다. 선지자 요엘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라고 말하고, 다른 예언자는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으리라”(잠 18:10) 말씀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 그리고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육신으로 거하신다는 말씀(골 2:9)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교리도 고린도인에게 소개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이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였다(고전 2:2).
하나님은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 명하셨는데(렘 9:24),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다. 또 바울의 여러 서신 첫머리에 인사말을 보면, 성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성자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여기서 우리는, 천부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성자의 중재로 온다는 것 뿐만 아니라,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성자 자신이 바로 그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실로 경건한 마음은, 자신이 생명의 깨우침을 받았으며 조명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또 의롭게 되었으며 성화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영원한 신격, 14-15)
14.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신격에 관한 증거도 이와 같은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보존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장식되기 전에 벌써 성령께서 저 혼돈된 덩어리를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준다(창 1:2). 성령께서는 온 우주에 편재하시어,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성장케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신다. 또한 그분께서는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있어서, 확실히 그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바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창시자이시며, 중생뿐만 아니라 영생의 창시자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성령에게도 성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신성에 속하는 기능들이 주어졌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하시고(고전 2:10),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시고(고전 12:10),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신다(출 4:11). 우리의 칭의는 성령의 사역이다. 능력, 성화(참조, 고전 6:11),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의 선이 다 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고전 12: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라는 말씀이, 성령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뿐만 아니라 그 창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표현해 준다(고전 12:11). 만일 성령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고 하면, 선택을 하고 또 의지(意志)한다는 것은 결코 그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명백하게, 신적 능력을 성령에게 돌리고 그가 하나님 안에 실재적(實在的)으로 머무신다고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