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장 섭리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적용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과거와 미래에 관계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설명. 1-5)
1. 하나님의 방법의 의미
인간의 성향은 터무니없이 교묘한 것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이 교리를 선하고 바르게 계속 사용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에 말려들게 되는 것을 거의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와도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섭리는 만물의 결정적 원리로서 이 섭리는 때로는 매개체를 통하여, 때로는 매개체 없이, 때로는 모든 매개체와 반대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섭리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시되, 특히 더욱 친근히 보호하기를 원하시는 교회를 지배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경계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 있다. 즉,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자비 혹은 엄격하신 공의가 자주 섭리의 전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든 사건의 원인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로 우리가 만일 정숙하며 침착한 마음으로 배우려 하기만 한다면 그 최종적인 결과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계획을 세우는 데 최상의 이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실 것이다. 또 아무리 원인이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시 40:5).
또한 우리는 겸손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해명하시지 않도록 힘쓰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을 존중하여 그의 의지를 만사의 가장 공정한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세계의 혼란한 상태가 우리의 판단력을 빼앗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소동을 가장 잘 고안된 질서로 조정하심으로써 저들을 바른 목적으로 향하게 하신다고 우리는 결론짓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에게는 겸손하여,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보류하기를 더 좋아하면서, 마땅히 경외해야 할 하나님의 감추어진 심판에 대해서는 거만하게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2.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기를 지으신 이요 우주의 창조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바르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시 36:6)고 하신 성경의 말씀은 무슨 뜻으로 기록되었는가에 대하여 저들은 답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지가 율법에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뜻을 멀리 구름이나 깊은 바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신 30:11-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심연과 비교되는 또 하나의 은밀한 의지가 있다는 것이 된다. 바울 또한 이에 대하여 같은 의미로 말한다(롬 11:33-34; 참조, 시 40:13-14). 실로 율법과 복음은 우리의 감각을 훨씬 초월하는 신비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으로 계시하기를 원하셨던 이 신비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해 신자들의 마음을 “총명의 신”(사 11:2)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심연이 없어지고, 다만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시 119:105), 생명의 빛(요 1:4; 참조, 8:12), 확실하며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방법은 당연히 심연이라고 불리며, 이는 그것이 우리 생각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경건하게 경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몇 마디 말로 이 둘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신 29:29; 욥 26:14; 욥 28:21, 28). 어거스틴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상의 질서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선한 의지로 율법에 의거하여 행동하지만,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서는 율법에 의거하여 움직여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불변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주 통치의 권리를 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를 견실과 겸손의 율법으로 삼아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를 의의 유일한 법칙이며 만물의 가장 의로운 원인으로 간주해야 한다. 즉 만물의 결정적 원리가 되는 섭리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이 섭리에서는 옳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저들은 미래와 관계된 모든 계획은 인간의 생각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저들은 현재 발생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탓으로 돌리고, 분명히 그 사건과 직접 관계있는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버린다.
4.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숙고(熟考)와 조화된다.
그러나 솔로몬은 미래사에 대하여 논하면서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섭리와 쉽게 조화시켰다(잠 16:9). 이 말씀은, 우리가 앞날을 준비하며 모든 문제를 정리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지에 항상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삶의 한계를 정해 주셨으며 동시에 그것을 잘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예비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셔서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도록 경계와 대책을 마련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명백해졌으며,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의 보호를 위탁하셨다고 하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보호해야 한다. 그가 만일 우리에게 구조의 수단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미리 위험을 경고하시면 우리는 무모하게 그 속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대비책을 마련해 주시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들은, 어떠한 위험도 그것이 운명적인 것이 아닌 한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이 운명적인 한 이에 대한 여하한 대비책도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벌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물리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명의 보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숙고하고 경계하는 기능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는 것을 이 어리석은 자들은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노출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된 수단으로 표현하신다.
5.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악함을 무죄로 하지 않는다.
역시 그들은 경솔하게 또는 그릇되게 과거의 사건들을 모두 하나님의 노출된 섭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발생하는 사건들이 다 섭리에 좌우되기 때문에 절도나 간음 그리고 살인은 모두가 신적 의지의 간섭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자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저들은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악한 성향에 의해 자극을 받고 오직 자신의 악한 욕망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그가 명령하신 것뿐이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고집이며 범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저들은 말한다. 물론 나도 이를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악을 행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일을 우리에게 명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생각지 말고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할 정도로 방종과 정욕에 깊이 빠져 앞뒤 분별 없이 행동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위대하고 무한하여 하나님은 악한 도구를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을 충분히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악의 실질과 죄책은 사악한 인간에게 있다. 이럴진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악인의 봉사를 사용하신다고 해서 어떻게 그가 어떤 불결한 것과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멀리서 하나님의 공의를 조롱할 수는 있어도 이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이 개와 같은 뻔뻔스러운 행동은 추방시켜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에 대한 명상: 섭리를 인지할 때 오는 복. 6-11)
6. 신자의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만사(萬事)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발생되며 무엇 하나 우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물의 근본 원인으로 바라보며 2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자신을 지켜 보호하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선과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판명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일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는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다음으로는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양쪽을 모두 지배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확신한다. 선인이건 악인이건, 인간에 관한 한 그 계획, 의지, 노력, 능력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며 또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제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신자의 안전을 돌보신다고 증거하는 매우 분명한 약속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시 55:22; 벧전 5:7; 시 91:1; 슥 2:8; 창 15:1; 렘 1:18; 사 49:15, 25; 시 91:12 등등).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후에(마 10:29) 곧 이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셨다. 즉, 우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하게 돌보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마 10:31). 그리고 주님은 이 사실을 더 확대하여,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확신시키셨다(마 10:30).
7. 하나님의 섭리의 중요성
하나님의 종은 이런 약속들과 실례들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될 때에, 모든 사람은 그들의 마음이 조정되든 혹은 남을 해치지 못하게 그들의 악의가 억제되든 다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접할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수들의 사악함을 분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때로는 저들에게서 분별력을 빼앗으심으로써 저들이 건전하며 온건한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드신다(왕상 22:22; 왕상 12:10, 15). 때로 저들에게 분별력을 주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놀라게 하시고 낙담케 하심으로써 저들이 생각한 바를 원하거나 계획하거나 혹은 수행할 수 없게 하신다. 간혹 저들이 자신들의 정욕과 광기가 자극하는 일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저들의 강포를 꺾으시며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신다(삼하 17:7, 14).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시며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다스리신다. 그리고 이 사탄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허락과 명령이 없이는 욥에 대하여 감이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욥 1:12).
이와 같은 지식을 가지게 될 때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를 보면, 번영할 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를 대한 우려에서는 놀라운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역사(役事)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건 아니면 무생물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건 간에 일체의 번영과 인간의 욕망 전체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호 2:21-22). 또한 이렇게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모든 역경에서 우리를 돕는다.
어떤 역경에 처하게 되면 그는 즉시 마음을 들어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인내와 마음의 평온을 그에게 가장 깊이 새겨 주실 것이다. 만일 요셉이 형제들의 배신을 계속 생각하였더라면 그는 형들에 대한 형제의 우정을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들의 불의를 잊었기 때문에 그는 온유와 관용을 보일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저들을 위로하기까지에 이르렀다(창 45:7-8, 50:20). 욥이 자기를 괴롭힌 갈대아 사람들을 주시하였더라면, 그에게는 복수의 불길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주께서 하신 일로 여기고 아름다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욥 1:21). 시므이가 다윗을 협박하고 또 그에게 돌을 던졌을 때, 만일 다윗이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더라면 아마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한 보복을 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시므이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부하들을 달랬다(삼하 16:11; 참조, 시 39:9). 만일 분노와 성급함에 대하여 이 이상 더 효과 있는 치료법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명상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크게 유익할 것이며 그 마음에 항상 다음과 같은 생각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의 뜻이니 마땅히 참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그 뜻을 반항함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옳고 유익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뜻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충동을 진정시키는 데 가장 유용한 교훈은, 하나님은 마귀와 일체의 행악자들을 대항해서 싸우려고 무장하시며 우리의 인내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경기의 심판자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재난과 고난이 인간의 간섭 없이 일어날 때에는, 모든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을 그 근원으로 하여 나오고,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신 28:2 이하; 15 이하) 율법의 교훈을 상기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 무서운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레 26:23-24). 사실 우리는 인류의 공통된 이해에 따라 번영이건 재난이건 모든 사건을 다만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할 뿐,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받고도 예배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애 3:38; 암 3:6; 사 45:7).
9. 중간 원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사람은 제 2의 원인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 인간적인 친절에 대한 감사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충심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고 자진하여 자신의 의무를 인정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또는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하기를 힘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하여는 하나님을 으뜸 되는 원작자로 공경하며 찬양하되, 인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존경할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가 그들에게서 유익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미래사에 관하여 그는 이런 종류의 하등 원인들을 고려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안녕을 위해 사용할 인간적 도움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원조를 청하는 데 있어서 그들과 상의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게을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당한 목표로 향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을 맡기고 복종시킨다. 그러나 그는 외부의 원조가 있으면 그것으로 안심하거나 또는 그것이 없다고 해서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두려워 떨 정도로 외부적인 원조를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만을 굳게 신뢰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의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섭리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10:12). 이러한 인식은 우리에게서 무모함과 자만심을 제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마음을 참된 소망과 신뢰와 용기로 가득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위험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경멸할 것이다.
1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우리는 비참한 존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을 보게 된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몸을 돌리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대상은 신뢰할 가치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절박한 죽음으로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살아 있으나 반은 죽은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은 마치 예리한 칼날이 항상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과 같은 허약한 마음으로 불안하고 활기 없는 한숨을 내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을 맹목적이며 무모한 운명의 공격을 받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11.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다.
더욱이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일단 경건한 사람에게 비칠 때, 그는 지금까지 마음을 누르고 있던 극단의 불안과 공포에서 뿐만 아니라 일체의 근심에서 구원과 해방을 받게 된다. 그것은 그가 운명을 당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담대하게 의탁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만사를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권위와 의지로 지배하시며 지혜로 조정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결정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천사로 하여금 돌보게 하셨다는 것과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한 물이나 불이나 칼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시 91:3-6). 여기서 또한 성도의 영광스러운 확신이 솟아나온다(시 118:6; 시 56:4; 시 27:3; 시 23:4; 시 71:14). 그런데 저들의 행복이 사탄이나 행악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섭리를 기억하거나 명상함으로써 힘을 얻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저들은 곧 약하게 도리 것이다. 그러나 사탄과 모든 행악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굴레를 씌운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억제를 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명령하시지 않는 한 우리를 해칠 어떠한 음모도 꾸밀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꾸민 후에라도 준비할 수 없고, 충분히 계획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행하는 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사탄과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쇠사슬에 속박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하도록 하자(살전 2:18; 고전 16:7; 시 31:15; 사 7:4; 겔 29:4). 이러한 생각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치는 위로를 줄 것이다.
(반대자들에 대한 답변, 12-14)
12. 하나님의 “후회”에 대하여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계획은 확고 부동한 것이 아니고 현상계의 성격에 따라 변화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첫째, 하나님께서 후회하신 것으로 언급된 실례가 몇 군데 있다(창 6:6; 삼상 15:11; 렘 18:8). 둘째, 하나님의 작정 중 얼마가 폐기되었다고 언급된 곳도 있다(욘 3:4, 10; 사 38:1, 5; 왕하 20:1, 5).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작정으로 인간사를 결정하지 아니하시고, 각자의 공과나 또는 하나님 자신이 공평 타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데 따라 매년, 매일, 또는 매시간, 이런 일, 저런 일을 결정하신다고 많은 사람은 주장한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곧 하나님께 무지, 오류, 무력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후회하심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후회를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변개치 않으신다는 것이다(삼상 15:29). 그리고 사무엘상 15장에서 이 둘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兩者)를 대조해 보면 외관상으로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충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는데, 이때의 마음의 변화는 비유적으로 기술된 것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은 사실적으로 명백하게 선언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는 영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후회를 초월하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이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민 23:19).
13.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고려하여 하나님의 “후회”를 말한다.
그러면 “후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적인 용어에 따라 서술하는 다른 모든 표현 방식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그 묘사를 낮추시는 방법은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가 아니고 우리가 그를 지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신다. 하나님께는 마음의 혼란이 전혀 없지만 죄인에 대하여는 분노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고 말할 때, 언제나 그것을 하나님께 무슨 감정적인 동요가 있는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경험에서 취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항상 흥분하고 노한 사람의 용모를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라는 말을 행동의 변화 이외의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행동의 변화로 자신의 불만을 증거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변화는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대한 정정(訂正)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정정은 후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후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동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지가 번복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결의가 변경된 것도 아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 변화가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영원으로부터 예견하시고 흡족해 하시며 작정하신 것을 영속적인 방법으로 수행해 나아가신다.
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단호하게 실행하신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하여 멸망을 선고하신 후 저들이 회개하자 저들을 용서하셨다는 것과(욘 3:10),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후 히스기야의 생명을 더 연장하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이 폐기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사 38:5). 그 안에는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결과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죽음을 미리 경고하여 그 죽음의 다가옴을 멀리서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목적이란, 그들을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회개케 하여 멸망을 받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실상 멸망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장수의 소망이 끊어졌던 것은 보다 오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상황의 성질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단순한 암시 속에 한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슷한 여러 가지 실례에 의해 확증된다(창 20:1-7). 그러므로 주께서 전에 선언하신 바를 취소하셨기 때문에 그의 최초의 목적이 폐기되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형벌을 경고하심으로써 그가 용서하고자 하는 자들을 회개케 하실 때에, 이는 자신의 뜻을 변경하거나 자신의 말씀을 변경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음절씩 설명하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실로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진실한 것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라”(사 1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