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톰 라이트 지음 | 이지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06월 17일 출간
-책 요약-
제 1장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코로나 펜데믹이 시작된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이들의 반응은 고대 철학자들의 생각의 범주에 놓여 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세상만사가 다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그것을 바꿀 도리는 없으니, 그냥 거기에 맞춰 사는 법을 배우라 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모든 일은 무작위로 일어나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고만 하였다.
플로톤 학파는 현세는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이 땅에서는 나쁜 일이 생기지만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잘 버티려고만 한다. 총알이 당신을 겨냥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대부분의 현대 서양인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같은 쾌락주의자다. 세상에는 온갖 일이 벌어지지만, 이들은 그저 안락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남들과 격리된 채 넷플릭스를 즐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면서.
일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어떤 사람들들은 플라톤을 선택한다. 죽음은 최악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침착하자. 대신, 골프장 문만 닫지 말아 달라.
기독교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교회 내 많은 사람이 고대의 반응과 비슷한 ‘기독교적’ 반응을 찾으려고 애썼다. 어떤 이들은 온갖 음모론에 빠져들었다. ‘기독교’ 음모 이론도 존재한다. 하나님은 이 사태를 통해 ‘종말의 징조’를 보여주시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많은 이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이때가 복음을 전할 좋은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을 때라고 말한다. 또 구약의 예언자들을 인용하여 이 모든 전염병이 우리의 죄 때문이며 우리를 회개로 이끌려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게 다 우리가 못마땅해하는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 잘못”이라는 것이다.
제 2장 구약성경 읽기
구약의 여러 경우를 보면 이스라엘의 재앙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예언자들이 곳곳에서 말한다. 이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는 뚜렷한 인과관계를 알 수 없는 재앙들도 있다. 시편 44편이 그것을 말하고, 욥기가 그것을 말한다. 특히 욥기에는 욥의 고난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 욥에게 벌어진 비극은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끝까지 그 사실을 붙잡았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가져다가 사용하셨을 뿐 아니라, 그 이야기대로 사시고, 그 이야기대로 죽으셨다.
제 3장 예수님과 복음서
이따금 예수님은 이미 일어난 재앙을 언급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고 청중에게 경고하셨다(눅13:1-9). 예수님은 대부분의 동 시대인과 달리 ‘시대의 표적’을 읽으실 수 있었다(눅12:49-59). 여기까지는 예언자와 같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셨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은 일반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 누구의 죄 때문에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손쉬운(죄가 하나 들어가면, 벌이 하나 나오는) 자동판매기 신학을 무너뜨린다.
“그도 죄를 짓지 않았고, 부모도 죄를 짓지 않았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보이시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요9:2-3).
예수님은 가상의 원인을 돌아보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지 내다보신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요11:35). 그분의 눈물은 진짜였다. 이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롭구나”라고 말씀하신 1장 27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십자가의 외침(마27:46; 막15:34)으로 이어진다. 사복음서는 이 연속된 사건들을 모아, 결국 예수님 중심으로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라는 핵심 개념, 권력, 하나님의 ‘통치’, ‘책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복합적인 방식을 만들어 낸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못 보는 사람의 과거를 돌아보시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지금 필요한 일을 알기 위해 앞을 내다보신다. 그리고 그 목표로 가는 길이 바로 눈물이다.
현대 서양인들은 섭리 교리(하나님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반적으로 감독하신다)와 속죄 교리(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를 사하신다)를 갈라놓았다.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 굳어져서, 신학자와 유명 기독교 작가들이 방 한쪽에서는 우리가 주요 유행병에 대해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할 기회를 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는 절대 갈라놓아서는 안 되는 이 둘을 다시 통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보아야 하지만 무시할 수도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경고하시려고 온갖 사건을 사용하실 수 있고, 또 사용하신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때 성육신하신 아들을 배제한 채 해석해서는 안 된다. 평소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 하셨고 하고 계시고 하실 모든 일 가운데 가장 뛰어난 ‘표적’이, 예수님, 곧 이스라엘의 메시야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중에 다시 오리라 약속하신 예수님, 온 세상의 진정한 주 예수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제 4장 신약성경 읽기
신약교회는 모든 전쟁과 사건과 질병을 죄의 결과로만 보지 않았다. 누가는 글라우디오 황제 때(주후 41-54년) 실제로 기근이 발생했다고 덧붙인다. 그 기간에 심각한 기근이 한 차례 이상 발생했다는 것을 다른 역사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자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표적이 틀림없어”라거나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일이 생기면 누가 가장 위험에 처하는가? 그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누구를 보내야 할까?
(세계 역사에서 그 이전에는, 한 도시의 다문화 집단이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다른 도시의 단일 문화 집단에 형제의 의무를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교회는 ‘어떻게 도와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전례가 없고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코로나19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참하는 방안이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을 바라보셨듯이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찾아, 기도하면서 그 말을 하고 그 행동을 실천했다. 이것이 바로 ‘선교’가 뜻하는 바다. 여기서는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누가 가장 위험에 처해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 누구를 보내야 할까?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통해 만사에 협력하신다.
세상이 격변을 겪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고통받는 세상에서 기도하는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는다. 바울은 이를 3단계로 표현한다. 첫째, 세상의 신음, 둘째, 교회의 신음, 셋째, 교회 안과 세상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신음이다(롬8:22-27). 이 특이한 현상, 하나님의 성령, 곧 하나님이 차마 말씀하지 못하고 신음하실 뿐인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바울은 탄식시편인 44편으로 돌아간다. 지금 교회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 8장 22-27절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할 때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소위 ‘책임져 주시기’를 기대한다. 통제하고, 정리하고, 마무리해 주시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보는 하나님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보는 하나님은 말없이 신음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보는 하나님은 그분이 ‘책임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려고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분이다. 나는 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를 종말의 표적이나 회개 요청, 복음 전도 기회로 해독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메시지라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궁극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망가진 세상에 대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우리가 그 왜곡된 모습에 말을 끼워 맞춰서 왜곡된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항상 ‘통제하고’ 계셔야 하는 하나님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KJV, NRSV, ESV, NIV 난외주 등). 그로 인해 우리는 무슨 재앙이든 어느 정도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나쁜’ 일에 때로 스토아학파의 담요를 덮어 버렸다. “신경 쓰지마.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룰 테니까.” 이런 태도가 정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위로일까? 우리가 연구한 성경 본문이 정말로 이런 수동적인 ‘수용’을 지지하는 것일까? 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에 대한 적절한 태도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폭넓게 수용되지는 않지만, 대안적 접근법을 통해 로마서 8장 28절이 다음과 같이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든 것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NEB, REB, RSV). 16, 26, 27절에서처럼 성령은 신자들의 내면에서 일하시고, 이 성령과 신자의 결합이 아버지와 협력하는 합동 부대다. 26절이 묘사하는 말 없는 탄식의 순간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그 희안하지만 꼭 필요한 교류를 하시며, 성령에 사로잡힌 신자들과 함께 일하시는 순간이다.
따라서 로마서 8장 28절의 격려와 위로는 스토아학파의 체념과는 다르다. 곧 하나님이 루이 안에서 일하고 계시니 우리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으라는 요청이다. 그 일은 그분의 ‘형상을 본받은’ 인간이 메시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특히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받는 세상에 대한 그분의 구원 계획의 일부로 ‘부르셨다.’ 이 때 신자들은 탄식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들을 치유하고,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캠페인을 벌이고, 위로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모두 탄식에서 비롯된다. 안디옥 교회처럼, 우리도 ‘왜’를 말할 수 없지는 몰라도, 희마하게나마 ‘무엇’을 찾을 수는 있다. 누가 위기에 처해 있는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일부 전통에서는 앞뒤가 바뀌기 십상이었다.
제 5장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독일 전투기가 런던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을 때 쓴 엘리어트의 <네 개의 사중주> 중 두 번째 시 “이스트 코커”를 묵상해 보자. 시인은 힘든 상황에서 우리가 얻으려는 모든 손쉬운 위안은 망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 위안을 꼭 붙잡는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들을 빨리 주시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둠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서. 겟세마네의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고 싶지 않아서. 기도할 때나 살아갈 때나 미봉책을 붙잡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탄식하라는 요청과 함께 사는 삶, 성령의 신음에 동참하는 삶은 힘들고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예수님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겟세마네에서 고뇌하셨으며, 십자가에서 버림받아 울부짖으셨다. 하나님나라는 이렇게 세워졌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특징이고 산상수훈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이 이미 온 세상의 진정한 주님이시라고 선포하러 나가는 사도행전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분은 원하는 일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기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세우시지 않았고, 지금도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작동되지 않는다. 섭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 끊임없이 만사를 ‘통제하는’ 철권통치가 아니다. 창세기 6장 6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을 보시고 “이걸로 뭔가 해보려고 내가 일부러 허락했지”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마음 아파하셨다. 그렇게 마음 아파하신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셨고, 그를 통해 재앙을 통과할 길을 만드셨다. 그런데 창세기 6장 6절에서 하나님을 묘사한 표현과 마가복음 14장 34절에서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구나”(‘탄식시’의 고전인 시편 42편과 43편 인용). 요한복음에서도 비슷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롭구나”(12:27, 시편 6편 인용). 예수님은 죽음과 절망의 홍수가 그분 앞에 몰려오는 것을 보신다. 노아와 달리, 그분께는 방주가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데리고 죽음의 홍수를 통과하여 부활절 아침에 동터오는 새 창조의 세계로 나오실 것이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질문, 교회와 국가를 비롯한 모든 연관 단체가 가장 높은 수준에서 진지하게 나누어야 할 대화의 최상위에 있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빠른 자가 부당 이익을 취하는 세계로 쉬이 돌아가지 않는 예방 정책을 찾기 위해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과 동역해야 한다. 물론 그 와중에, 세계보건기구를 강화하고, 세상 모든 나라가 그 정책과 규약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현실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다. 창조세계와 신음하면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함으로 새로운 창조세계가 탄생할 수 있도록 비전과 현실을 나란히 붙잡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도전적인 순간에 바로 궁정의 요셉처럼 일할 수 있는 사람, 상황을 분석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비전을 그려 줄 사람이다. 정치인과 같은 현명한 리더십을 지니면서도, 앞으로 몇 달 동안 닥칠 도전들을 비전과 현실주의를 겸비하여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옛 체제를 재생하여 더 나은 새로운 체제를 발명할 새로운 운영 방식, 그리하여 새 창조의 전조를 내다볼 수 있는 운영 방식을 볼 수도 있다. 교회와 국가 지도자들을 지켜보고 기다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는, 이 탄식의 시기를 기도와 소망의 시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집트의 요셉처럼, 상처 입은 하나님의 세상 전반에 창의적이고 치유하는 정책과 행동을 불러올 현명한 인간 지도력과 주도권을 소망해야 한다.
<본 책은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타임>지의 요청으로 연재한 글을 편집하여 책으로 낸 톰 라이트의 글이다. 코로나 유행 초기에 나왔기에 코로나 3년째를 맞이한 현재의 상황과, 또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가 남아 있지만, 당시 신약성경 학자가 어떤 관점으로 코로나를 바라보고 조망했는지에 대한 작은 통찰을 얻는 데 도움을 줄 책이다. 또한 이 책을 바탕으로 현재를 진단하고 앞으로 우리는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