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2권: 2장 노예의지. 1~17항

by 더락 posted Sep 0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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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

 

 

(논제의 위험성들: 입장을 확립한다.1)

1.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가 노예 상태로 낮아진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그리고 만일 자유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아야겠다. 어거스틴은 두 가지 위험성을 지적한다. (1) 사람은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전연 없다고 들을 때에 즉시 이 사실을 구실로 자기 만족에 빠진다. 자력으로는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듣기 때문에, 그런 추구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듯 외면해 버린다. (2)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공로를 돌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게 되며, 사람은 파렴치한 자기 과신으로 파멸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사람에게 남아 있는 선은 전연 없으며 극히 비참한 궁핍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애로 사람에게 가장 고귀한 영예의 표지들이 뚜렷했을 때에도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그 자신의 배은(背恩)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서 극도의 치욕된 상태로 떨어진 지금은 더욱 겸손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빈곤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자유 의지론을 비판한다. 2-9)

2. 철학자들은 이해력의 힘을 믿는다.

철학자들은, 지성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성은 선하고 복된 생활을 하기 위한 주도적인 원리라고 단언한다. 다만 이성은 그 자체의 우수성을 견지하며 자연이 부여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저 저급한 충동(감각)에 대하여서는, 감각은 사람을 오류와 미망(迷妄)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이성의 채찍으로 길들이며 점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성과 감각의 중간에 의지를 둔다. , 의지에는 독자적인 권리와 자유가 있어서, 이성에 복종하거나 감각에 몸을 팔아 더럽히는 등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3. 이와 같이 철학자들은 결국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철학자들은 선행과 악행을 우리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면 그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말한다. 모든 철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이성은 바른 행위를 위한 충분한 인도자며 이성에 순종하는 의지는 악한 일을 하도록 감각의 선동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지도자인 이성을 따르며 결코 방해를 받지 않는다.

 

 

4. 교부들의 생각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의지의 자유를 정했다.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죄로 인하여 사람에게 있는 이성의 건전성에 중대한 손상이 있었으며, 악한 욕망으로 인하여 의지가 심한 노예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교회의 저술가들은 모두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는 지나치게 철학자들에게 가까이 간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초기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데는 다음과 가은 두 가지 목적과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나는 본다. 첫째로, 인간의 무력(無力)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그들과 대립 관계에 있떤 철학자들의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둘째로, 선에 대해서 이미 무관심한 육()에게 나태할 새로운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특히 둘째 점, 즉 나태할 구실을 주지 않으려는 점에 그들은 특히 유의했다. 크리스소톰(Chrysostom)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도 동시에 바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또 많이 쓴 표현 중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것을 드리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실 것이다.”라는 표현이다. 제롬(Jerome)도 이와 일치하는 말을 했다. “우리는 시작하고 하나님께서는 완성하신다. 우리는 힘써 드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

확실히 이런 발언들은 덕에 대한 사람의 열의를 과대 평가한 것이다. 우리가 인용한 이 의견들이 전연 허위라는 것도 조금 뒤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도 교부들-특히 크리소스톰-이 인간의 의지력을 찬양하고 있는데,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대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주장이 서로 다르며 혹은 동요하고 또 혼란한 상태이다.

그들의 뒤를 이은 다른 저자들은 각각 인간성을 교묘하게 옹호하느라고 자랑하고자 했지만 점점 타락하여, 마침내 사람은 감성(感性)부분에서만 부패하고, 이성은 완전 무결하며 의지 또한 대체로 손상이 없다고 하게 되었다. 라틴 사람들은 여전히 올바른 것같이 항상 자유 의지라는 말을 썼다. 헬라 사람들은 더욱 외람된 말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각 자기 손에 힘을 쥐고 있는 양, 자력(自力) 또는 자주(自主)라고 불렀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천품으로 받았다는 원칙을 모든 사람이-일반 민중까지도-믿었다. 그러나 명성을 원하는 일부 사람들도 이 원칙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말의 힘을 검토하고 그 다음에 성경이 단순한 증언을 토대로, 사람은 그 본성에 따라 선악간 어떤 가능성이 있는 가를 결정하겠다.

모든 사람의 글에 자유 의지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지만 그것을 정의한 사람은 적다. 오리겐(Origen)은 자유 의지는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의 능력이며 선악을 선택하는 의지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선을 택하며 은총이 없을 때에 악을 택하는 이성과 의지의 능력을 자유 의지라고 한 어거스틴도 오리겐과 의견이 다르지 않다. 롬바르드와 스콜라 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정의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의 정의가 더욱 분명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마스(Thomas Aquinas), 원래 자유는 의지에 속한 것이며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선택 능력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능력은 지성과 욕구의 혼합으로 생긴 것이지만 보다 욕구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자유 결정의 힘이 있는 자리라고 가르치는 곳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이성과 의지인 것이다. 그들이 이 두 가지에 각각 얼마를 돌리는가를 보는 것이 우리가 다음에 할 일이다.

 

 

5. 교부들이 생각한 의지자유는 여러 가지였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중간적인 것을 대개 사람의 자유로운 의견에 속한 것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에 돌렸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세 가지 자유를 구별하여, 첫째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죄로부터의 자유, 셋째는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 처음 것은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므로 결코 빼앗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는 죄로 인해 잃어버렸다. 나는 기꺼이 이 구별에 찬성하지만, 필연성과 강제를 혼동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6. “역사하는은총과 협력하는은총

인간은 선을 행할 힘을 완전히 빼앗겼는지, 아니면 비록 미약하지만 아직은 다소의 힘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 곧 자체만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은총의 도움을 얻으면 자기 몫을 할 수 있는가 gsk는 문제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명제집(the Sentences)의 선생은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처음 종류를 역사(役事)”하는 은총이라 불렀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선을 행하려는 뜻을 효과적으로 가지도록 마련하낟. 둘째 것을 협력하는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하나의 보조(補助)로서 선한 의지를 따른다. 이 구분에서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선에 대한 효과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은총에 돌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의 본성에 따라-효과적이 되지 못하는데도-선을 추구한다고 암사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두스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다고 단정하면서도, 사람은 자기의 충동으로 이런 종류의 선한 의지를 구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조하는 은총과 우리가 협력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은총을 멸시함으로써 그것을 무력하게 만들든, 그렇지 않고 그것에 복종해서 확인하든지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분에서, 적어도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유 의지를 사람에게 인정하는가는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선과 악을 행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이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강요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롬바르드는 마지막으로 단언한다. 롬바르드에 의하면, 비록 우리가 악해서 죄의 노예가 되었고 또 죄를 짓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경우라도 이 자유는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7.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인이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자유 의지론을 확립하지 못한다.

나는 묻고자 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의지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힘으로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자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열심히 경고하기만 하면 이런 위험성은 제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허위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사람의 성향이며, 긴 강화(講話)에서 진리를 깨닫기보다는 한 마디 말에서 오류를 얻는 편이 더 빠른 것이다. 고대 저술가들의 뒤를 이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배들의 해석을 무시하고 이 말의 어원적 의미에만 집착한 나머지 파멸적인 자신(自信)에 빠지고 말았다.

 

 

8. 어거스틴의 자유 의지론

우선, 어거스틴은 서슴지 않고 의지는 부자유하다고 한다. 의지가 죄악에 빠져 정복을 당했을 때에 인간의 본성은 그 자유를 잃기 시작했다. , 사람은 자유 의지를 악용하여 자기와 및 자기의 의지 모두를 잃어 버렸다. , 자유 의지는 노예가 되어 그 결과 지금은 의를 행할 힘이 없다. , 하나님의 은총이 해방하지 않은 것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 율법이 명령하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듯이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않지만, 성령께서 돕고 사람의 의지가(비록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해방되어) 복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는 실현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은 자유 의지의 큰 힘을 받고 창조되었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버렸다고 다른 곳에서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확립된다는 것을 밝힌 후에, 은총이 없어도 자기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통렬하게 꾸짖는다. 그는, 의지가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되지는 않았다고, 곧 의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은 의지의 결정에 의해서만 의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구주의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고 한다.

 

 

9. 교부들 사이에 있는 진리의 음성들

어거스틴도 자주 반복한 키프리아누스(Cyprianus)의 말이 있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사람은 자기의 권리라고 할 것이 전연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간혹 그들이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찬양한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기의 덕성에 대한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자기의 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제 나는 사람의 본서에 대하여 그 진상을 간략하게 설명하게 되었다.

 

 

(모든 자기 긍정을 버려야 한다. 10-11)

10. 자유 의지론은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을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자기의 참회와 빈곤과 벌거벗음과 치욕을 깨닫고 완전히 타도되며 압도된 사람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전진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自信)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 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 참으로 이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침입해서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한다면,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기를”(3:5) 원하라고 권고한 바로 그 모사(謀士)가 우리에게 이 생각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이 악마의 말이라면, 원수의 충고를 듣고 싶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의 말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이 허무한 신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철저하게 꺾어 버리는 중요한 성경 구절에 귀를 기울여 그 만류를 받아야 한다. 17:5, 147:10-11, 40:29-31 등의 구절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원한다면 아무리 적은 힘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44:3, 55:1과 같은 구절들은, 자기의 빈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허락을 얻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예컨대 이사야서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60:19). 물론 주께서는 종들에게서 해와 달의 빛을 빼앗으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만이 홀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므로, 그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도 믿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11.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만 영예를 돌린다.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랑과 교만을 삼가는 것을 어거스틴은 겸손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겸손 이외에는 자기가 피난할 곳이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은 원래 사탄이다. 사람의 복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우리 자신의 것은 죄뿐이 아닌가? 너 자신의 것인 죄를 버리라.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도 인간성의 능력을 중요시하는가? 그것은 상하고 부서지고 혼란하고 망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이지, 그릇된 자기 변호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 대하여 하나님과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만큼 우리의 행복이 손상을 입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의 자비를 힘입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애(自愛)와 야심이라는 병이 있기 때문에 눈이 어둡고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이다(참조, 6:3). 오직 나는, 이 병을 버리고 성경이라는 진실한 거울 속에서 자기를 바르게 인식하라고 요구할 뿐이다(참조, 1:22-25).

 

 

(사람의 천품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오성<悟性>, 12-17)

12. 초자연적인 천품들은 소멸되었고 자연적인 천품들은 부패했지만,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만한 이성(理性)은 남아 있다.

어거스틴은, 사람의 자연적인 천품은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인 천품은 사람에게서 제거되었다고 한 의견을 기쁘게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졌을 때에 동시에 영적 능력, 곧 영원한 구원을 얻을 희망으로 받은 천품들을 빼앗겼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쫓겨나 영혼의 복스러운 생활에 속하는 성질들이 온통 소멸되었으며, 중생의 은총에 의하여 처음으로 회복된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성질은 곧,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성결 및 의에 대한 열성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회복시켜 주시므로, 외래적인 것이지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된다. 이것이 곧 자연적 천품의 부패이다. 오성(悟性) 또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의지력과 함께 다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력할 뿐 아니라 깊은 암흑 속에 빠진 지성을 완전히 건전한 지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지가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을 구별하며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은 자연적인 천품이며, 따라서 이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일부분은 약화되고 일부분은 부패되어 기형적인 잔해가 남았다. 1:5 말씀에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표현되었다. 첫째로, 사람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 아직도 어느 정도 희미한 빛이 번득인다. 그것을 보면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며 천부의 이해력이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그러나 둘째로, 이 빛은 짙은 무지가 덮어 질식시키므로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지도 사람의 본성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지만, 사악한 욕망에 긴밀히 결속되어 있어서 바른 일을 추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일종의 욕망이 인간성에 내재한 것을 보며, 이미 그 진리를 맛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그것을 동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오성은 원래 진리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각 능력이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 동경은, 그대로 두면 곧 허무한 데 빠지기 때문에 경주에 참가하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다. 실로 사람의 지성은 둔감하여, 바른 길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오류 사이를 헤매며 어둠 속을 더듬는 것같이 자꾸만 넘어지다가 종내 길을 잃고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지성은 진리를 추구하며 발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허무에 눌려 가련한 수고를 하고 있는데, 종종 마땅히 힘써 알아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하고 무가치한 것을 탐구하여 자기의 어리석은 호기심으로 괴로움을 당하면서 특히 이해해야 할 문제들에는 거의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13. 지상의 일과 인간 사회의 형태에 관한 오성의 능력

그러나 오성의 노력은 아무 결과도 없을 정도로 항상 무가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성은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하려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거기에 대하여 다소의 경험을 하는 총명이 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할 때에는 그 기능이 균등하지 못한데, 지성이 현세의 영역을 넘을 때에는 자체의 무력을 현저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지성이 그 능력의 정도에 따라 전진할 수 있는 범위를 더욱 분명하게 알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땅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다. “땅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현세에 관해서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세의 범위 내에 국한되었다. “하늘의 일은 하나님과 진정한 의의 본성과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의미한다.

처음 종류의 것은, 사람은 본성이 사회적 동물이므로,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사회 생활을 육성하며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회 생활상의 공정성과 질서에 대하여 보편적인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법에 관해서는 모든 민족과 모든 개인이 한결 같이 합의하게 된다. 교사와 입법가가 없어도, 법의 씨앗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인정한 것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이 금지한 일을 칭찬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이 법을 미워하는 것은, 그 법이 선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경솔한 정욕에 미쳐서 명백한 이성과 싸우는 것이다. 오성으로는 시인하는 것을 정욕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지성이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 지성은 바른 길을 따르는 듯이 보일 때에도 절름거리며 비틀거린다. 그러나 사회 질서의 씨앗이 모든 사람 속에 심어져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14. 학술과 기예에 관한 지성

다음으로 학술(學術)과 공예(工藝)에 관해서, 우리는 모두 이것들을 배울 만한 어느 정도의 적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인간의 총명이 나타난다. 어느 한 가지를 배울 힘과 능력뿐만 아니라, 각 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고안하며 선배에게서 배운 것을 더욱 연마 완성하기도 하는 힘과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 증거는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이성과 오성에 보편적으로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이것은 경건한 사람들과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부여되므로 선천적인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15. 학술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속 저술가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쓴 것을 보면, 거기에는 진리의 훌륭한 광명이 비치고 있다. 이 광명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은 비록 그 완전 상태에서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훌륭한 능력을 아름다운 옷과 같이 입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인정한다면, 진리가 그 어디에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결코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성이 그 진정한 선을 빼앗긴 후에도 주께서는 많은 선물을 인간성에 남겨 두셨다는 것을 그들의 예를 보아서 깨달아야 한다.

 

 

16. 학예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동시에, 인류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개인들이게 주시는 가장 훌륭한 은혜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 생활에서의 가장 훌륭한 일들에 대한 지식은 모두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참고, 31:2-11; 35:30-35). 신자들 속에만 하나님의 영이 계시다는 발언은(8:9) 성결의 영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결의 영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별되는 것이다(고전 3: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성령의 힘으로 모든 것을 채우시고 움직이시며 살리신다. 우리가 자연 과학과 논리학과 수학과 그 밖의 학술의 도움을 받으며 불신자들의 활동과 봉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 도움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참조, 2:8) 진리를 이해하는 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를 참으로 축복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이해력과 거기에 따르는 지식은, 만일 진리의 견고한 기초가 그 밑에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불안정하고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우리는 즉시 첨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 값없이 주시는 천품이 사람에게서 철수된 것과 같이 남아 있는 자연적인 천품들도 부패했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참으로 옳은 가르침 때문이다.

 

 

17. 12-16까지의 요약

이상을 요약하면, 우리의 본성에 이성이 고유하다는 것을 인류 전체에서 볼 수 있으며, 동물이 감각을 가진 점에서 무생물과 다른 것과 같이 이성은 우리들과 동물들을 구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전적으로 파멸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특히 예리한 두뇌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판단력이 월등하다. 또 어떤 사람은 기술을 배우면 곧 깨닫는 총명이 있다. 이런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은총을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하심에서 흘러 들어온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그 소명에 따라 특별한 활동을 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일찍이 특별한 재능과 기술이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둔해지는 것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수중과 뜻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매순간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형적을 보며, 이 형적이 인류 전체와 다른 피조물들을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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