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중생하지 않으면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18-21)
18. 우리의 오성의 한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통찰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은 무엇을 식별할 수 있는가를 분석해야겠다. 이 영적 통찰에는 주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1) 하나님을 알고, (2) 우리에게 대한 아버지 같은 그의 호의, 즉 우리의 구원을 알며, (3) 하나님이 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정돈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점에서는(1과2) 가장 위대한 천재들조차 두더지보다 더 눈이 어두웠다. 물론 철학자들의 글에는 곳곳에 하나님에 대한 유능하고 적절한 발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에서는 항상 일종의 경솔한 상상이 엿보인다. 그들은 사물을 보아도 진리로 향하지 못했으며, 진리에 도달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들은 어두운 밤에 들판을 걸어가는 사람과 같아서, 번갯불이 일순간 비치면 널리 사방을 보지만 한 걸음도 채 전진하기 전에 빛은 사라지고 다시금 그는 밤의 암흑 속에 빠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저술의 여기저기에 진리의 작은 방울 몇 개 우연히 떨어뜨리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을 더럽히는 해괴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지! 요컨대, 그들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하게 느낀 일조차 없다. 이러한 확신이 없으면 사람의 오성에는 무한한 혼란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성은 이 진리-즉, 진정한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그는 우리들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시는가를 이해하는 진리-에 접근하거나, 또는 접근하려고 노력하거나, 심지어는 이 진리를 직접 목표로 삼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19. 요한복음 1:4-5로 사람들의 영적 맹목을 증명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광명이 비치기 때문에 작은 불꽃이나 적어도 불똥이 없을 때가 없으며, 이런 조명이 있는데도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사람의 예리한 지성은 맹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다.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만한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없다(요1:13; 마16:17).
20.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중생의 영을 통해서(참조, 딛 3:5) 주시는 것은 모두 우리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참조, 시 36:9; 고전 12:3; 요 3:27). 요한이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이 주는 일반적인 천품이 아니고 특별한 조명이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천거한 자기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그의 불만을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모세까지도 백성들의 건망증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다고 한다(신 28:3-4). 그렇기에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이것을 특별한 은총이라고 하신다(렘 24:7). 확실히 이것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셔야만 영적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이 점을 인정하셨다(요 6:44). 그리스도는 성부의 산 형상이시며(참조, 골 1:15), 아버지의 영광과 광채가 전적으로 계시되었다(참조, 히 1:3).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시려는 목적이었다(참조, 요 1:18). 그리고 그분은 그의 사명을 충실히 다 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적 교사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전파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께로 온다(사 54:7; 요 6:45; 사 54:13). 즉 성령께서 놀랍고 특별한 능력으로 우리의 귀를 듣게 만들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의 앞에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이 문제를 솔직하게 논의하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1:18 이하). 그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누구를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인가? 자연의 광명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적 신비를 전연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연 이해할 수 없다. 이 신비들은 사람들이 통찰할 수 없도록 깊이 숨겨졌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께서 비추시지 않으면 신비는 미련한 것으로 인정된다. 아직도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에 예리한 통찰력이 있다고 하며 그것에 의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비밀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이런 광적인 생각은 버려야 한다.
21.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사람에게 없다고 하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기도의 형식으로 하나님께만 돌린다.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구하노라”(엡 1:17). 이제 우리는 모든 지혜와 계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듣는다. 또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한다(엡 1:18 하-19).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소명을 알 만한 이해력이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인정한다.
여기서 펠라기우스의 무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의 교훈으로 사람의 이해력을 인도하시며, 이런 인도를 받지 않고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얻게 하시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의 우매 또는 무지를 시정하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허튼 말이다. 다윗에게는 율법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지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자기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원한다(시 119:18). 분명히 그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위에 비칠 때에 해가 땅 위에 솟지만, “빛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분이(약 1:17) 눈을 뜨게 하시거나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말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그 빛을 비추시지 않는 모든 곳은 암흑이기 때문이다.
(죄와 무지를 동일시하는 플라톤을 부정한다. 그러나 죄는 미망<迷妄>에 의해 생길 수 있다. 22-25)
22.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를 가졌으므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나, 그 증거에서 바른 지식을 얻지는 못한다.
이제 남은 것은 영적 통찰의 셋째 방면, 즉 바르게 살아가는 원칙을 아는 것이다. 때때로 인간의 지성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더 높은 일들보다 오히려 이 일에 대하여 더욱 민감한 듯이 보이는데, 이는 사도 바울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롬 2:14-15).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자연법에 의해 사람이 행위의 바른 표준을 충분히 배운다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사람에게 이 법 지식이 부여되었는가를 생각해보자. 자연법은 사람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자연법은 공정과 불공정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양심의 깨달음이며, 사람이 무지를 구실로 삼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 자신의 증언에 의해 유죄를 증명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자연법에 대한 정의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연법은 공정과 불공정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양심의 깨달음이며, 사람이 무지를 구실로 삼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 자신의 증언에 의해 유죄를 증명한다면, 이것은 자연법에 대한 정의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죄인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자기의 고유한 능력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것에 붙잡히게 되며, 싫든 좋은 간에 간혹 눈을 뜨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 능력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말이다.
23. 임의로 선악을 판단할 때에는 그 판단은 분명한 것이 못된다.
일반적인 정의나 문제의 본질에 관해 지성이 속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거기서 더 멀리 가려고 할 때에, 즉 원칙을 특수한 경우에 적용할 때에는 틀리기 쉽다는 데미스티우스(Themistius)의 가르침은 더욱 옳다. 사람은 무지하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당하면 방금 설정한 일반적인 원칙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데미스티우스의 원칙에는 예외가 없지 않다. 악행의 수치가 양심을 심히 억압하기 때문에, 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면서도 일부러 사악에 돌입하는 때가 있다. 일례로 “나는 무엇이 더 좋은가를 알고 또 시인하지만 나쁜 편을 따른다”라고 한다.
24.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는 전연 무력하며, 둘째 돌판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경우에 무력하다.
완전한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으로 우리의 이성을 측정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성이 맹목인 것을 깨달을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첫째 돌판의 중요한 점들을 전연 따르지 않는다. 세속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에는, 그 허망하고 사소한 짓들을 버리도록 아무리 말해도 항상 다시 그리로 되돌아간다. 물론 그들은, 성실한 의도가 동반하지 않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에 관해서 어떤 관념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증언하지만, 거짓된 방법을 고안해서 곧 이 관념을 부패시킨다. 경배에 관해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다.
둘째 돌판에 있는 교훈들에 대하여(출 20:12 이하) 사람들은 좀더 이해력이 있는데, 이 교훈들은 그들 사이에 사회 생활을 유지하는 일과 더욱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간혹 인내심이 없는 것을 본다. 성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 사람도, 불공정하고 지나치게 거만한 지배는 벗어 버릴 방법만 있다면 참고 견디는 것은 전연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육욕을 고려하지 않는데, 자연인은 정욕이라는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빛은 사람이 이 심연에 들어서기도 전에 꺼져 버린다.
25. 우리가 그릇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의 이성은 무수한 형태의 속임수에 압도되며 무수한 오류에 빠지고 또 무수한 장애물에 부딪히며 무수한 곤란을 만나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다. 참으로 바울은 인생의 각 방면에서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밝힌다(고후 3:5). 즉 그는 어떻게 무슨 일을 바르게 행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천품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천품이라고 생각하는 예리한 이성을 빼앗기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너무도 가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며”(고전 3:20; 참조, 시 49:11),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성령께서는(창 6:5, 8:21) 이 일을 가장 적합하다고 보신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에 있는 이성은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무참하게 허무에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도 이 무력함을 알고 주의 계명을 바로 배울 만한 깨달음을 얻기를 기도했으며(시 119:34), 한번이 아니라 하나의 시에서 거의 열 번씩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한다(시 119:12, 18, 19, 26, 33, 64, 68, 73, 124, 125, 135, 169). 이렇게 되풀이함으로써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곤란한가를 암시한다. 바울은 더 나아가 자주 모든 교회를 위하여 간구한다(골 1:9-10; 참조, 빌 1:9).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할 때마다 동시에 이 일이 사람의 능력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언한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성경의 교훈을 보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 하루만 조명을 받고 그 후에는 자기 힘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방금 바울에게서 인용한 구절이 계속적인 전진과 성장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 뜻을 적절한 말로 표현했다(시 119:10). 거듭나고 진정한 경건에서 적지 않은 진전을 한 그였지만, 이미 받은 지식에서 후퇴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매순간 계속적인 인도가 필요하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허물로 잃어버린 바른 정신이 회복되기를 기도한다(시 51:10).
(사람에게는 선한 일을 결심할 힘이 없다. 26-27)
26. “선한” 것과 “가(可 )한” 것을 동등시하는 자연적인 본능은 자유와는 무관하다.
이제 우리는 결정의 자유를 특히 좌우하는 의지를 검토해야 한다. 선택은 오성보다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우선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자연적인 본능에 의하여 선을 추구한다고 가르치며, 이 견해는 일반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인간의 의지의 고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점을 알기 위해, 우리는 자유 선택의 능력은 이런 욕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욕구는 마음이 숙고한 결과가 아니고 자연적인 경향에서 생기는 것이다. 훌륭한 영원 불멸의 본성, 곧 이성이 있으면서도, 인간은 자기에게 참으로 선한 것을 이성으로써 선택하고 열심히 추구하지도 않으며 또 이성을 가지고 신중히 고려하거나 지성을 경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동물과 같이, 이성이나 숙고함이 없이 본성의 경향을 따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성의 충동으로 선을 구하게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의지의 자유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대신에, 사람이 바른 이성으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알고 선택하며 또 선택한 다음에는 그것을 따른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 두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여기서의 “욕구”는 의지의 충동이 아니라 본성의 경향을 의미한다. 둘째, “선”은 덕성이나 공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들이 잘 될 때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요컨대 사람은 선한 것을 따르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영원한 복락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성령의 충동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평안에 대한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은 의지의 자유를 증명하지 못한다.
27. 성령이 없이 우리의 의지는 선을 사모할 수가 없다.
우리가 효과적으로 결심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처음 은총에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영혼에 자발적으로 선을 갈구하는 능력이 있지만 너무도 미약해서 확고한 의도가 되거나 노력을 분발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 사도 바울의 말도 사람을 그와 같이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롬 7:18-19).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여기서 추구하는 논법을 전적으로 곡해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투쟁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갈 5:17에서는 더욱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것은 신자들의 끊임없이 느끼는 영육간의 투쟁이다. 바울은 자기 안에 아무 선도 거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곧 자기의 육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첨부했다(롬 7:18). 따라서 악을 행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안에 거하는 죄라고 한다(롬7:20). 그가 “내 속 곧 내 육신에”라고 교정한(롬 7:18) 뜻은 무엇인가?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본래 내 안에는 선이 거하지 않는다. 나의 육에서는 아무 선한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변명이 따른다(롬 7:20). 이 변명은 영혼의 대부분이 선으로 기울어진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도다”(롬 7:22-23). 성령에 의해 중생했으면서도 아직 육의 잔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마음속에서 이런 투쟁을 할 것인가? 만일 사람에게 은총과는 별도로 선을 행하는 어떤 충동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충동이 아무리 적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고후 3:5) 사도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모세를 통해, 사람의 마음의 계획은 악할 뿐이라고 선언하시는 주님께는(창 8:21)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우리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존중하자. 우리는 모두 본성이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를 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 전체가 죄의 세력 하에 있다면, 분명 그것은 죄의 중요한 자리인 의지가 필연적으로 가장 든든한 차꼬로 속박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성령의 은총을 받기 전에 어떤 의지의 작용이 있었다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13)라는 바울의 말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앞질러 모든 일을 하셨다. 이제 그대들은 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기 전에 행동을 취하라. 어떻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라. 그대들에게 있는 것은 모두 그에게서 온 것이며 모든 악은 그대들 자신이 근원이라고 고백하라.” 그리고 조금 뒤에, “우리의 것은 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