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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의 책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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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 받을 일밖에 없다.

 

(사람의 본성은 심히 부패해 있으므로 전적으로 그 지성과 의지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 1-5)

1. 인간은 전적으로 육()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3:6)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간 전체를 묘사한다면(이것을 증명하기란 쉬운 일이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의 초라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본성에는 육밖에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서 어떤 선을 추출해 낼 수 있는가를 당신은 시험해 보라. 혹자는 말할 것이다. 육이라는 말은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고상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와 사도의 말씀에 의해 철저하게 반박된다. 사람은 이므로(3:6)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3:3) 주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영혼은 그 일부분만이 개조된다고 해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갱신되어야만 다시 나는 것이다. 영과 육은 완전히 대립되어, 중간적인 것이 있을 여지가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서 영적이 아닌 것은 모두 육적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중생하지 않고는 결코 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육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모든 의혹을 바울이 일소해 준다(참조, 4:22-3, 4:17-18, 20). 이사야도 그리스도의 나라를 약속할 때에,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60:2)라고 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시리라(60:19) 예언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위에만 비치고, 교회 밖에는 어두움과 맹목 상태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여기서의 그의 증거이다. 다음의 다윗의 발언은 참으로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허무와 함께 사람을 저울에 달면, 들려 허무보다 경하리로다”(62:9, 의역). 인간의 생각은 모두 미련하고 경망되며 헛되고 패악하다고 조롱을 받으니 인간의 오성은 여지없이 깨뜨려진 것이다.

 

2. 로마서 3장이 사람의 부패를 중언한다.

마음에 대해서도 이에 못지 않게 엄격한 비난이 있다(참고, 17:9).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교마을 없애고자 몇 가지 증언을 하였다(3:10-12; 참조, 14:1-3, 53:1-3, 5:9, 140:3, 10:7; 59:7; 36:1; 3:10-16, 18). 사도 바울은 이런 벽력과 같은 말씀으로 어떤 특수한 사람이 아닌 아담의 후손 전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 어느 한 시대의 부패한 풍습을 비난하지 않고 우리의 본성이 한결같이 부패한 것을 고발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의 바울의 의도는(3:10-12)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단순히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큰 재난에 휩쓸렸으며, 하나님의 자비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려 한 것이다. 그는 사람에게 아무 의(), 즉 아무 성실이나 순결이 없다고 하였고, 다음에 총명이 없다고 하였다(3:10-11).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은 총명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 결함이 있다. 끝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단언한다. 만일 이런 점들이 인류의 유전적인 천품이라면, 우리의 본성에서 어떤 선한 것을 찾는 것은 무익한 행위이다.

 

3. 하나님의 은총은 정결하게 만들지 않고 다만 억제하는 때가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기의 천성에 따라 평생 덕을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열렬한 성실은 그 천성에 어느 정도의 순결성이 있음을 증언했다. 이럴 때 인간성이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판단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경고하는 듯이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천성에 고무되어 여러 가지 훌륭하고 탁월한 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일평생 아주 고결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러나 여기서 우리는, 본성이 부패한 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움직일 여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은총은 본성을 정결하게 만들지는 않을지라도 내면적으로 억제하는 은총이다. 만일 주께서 각 사람의 마음이 정욕대로 날뛰는 것을 방임하신다면, 바울이 모든 인간성에 있다고 비난하는 악한 것이 모두 자기 안에 참으로 있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14:3; 3:12)

주님은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병을 고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을 제어하는 것이 만사를 유지하는 데 유익하다고 예견하시기 때문에 굴레를 씌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억제하신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체면상 여러 가지 추악한 짓을 하지 못하며,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추악상을 대체로 감추지 않으면서도 법이 무서워서 제한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직한 생활 태도가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그것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반 수준을 넘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우수한 인물이 되려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섭리로 패악한 인간성을 제어하셔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으시지만, 그렇다고 인간성을 내면적으로 정결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니다.

 

4. 정직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성은 여전히 부패했다.

만일 자연인이 이런 탁월한 도덕적 완전성을 가졌다면 확실히 인간성에는 덕을 함양할 능력이 없지 않다고 추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쉬운 해결책이 있으니, 곧 이런 것은 인간성에 공통한 천품이 아니라 원래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과 정도로 내려 주시는 특수 은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지배자가 될 운명인 사람들에게 영웅적 기상을 주시는 때가 많다. 역사상 유명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성품도 여기서 왔다. 일반 서민들도 같은 식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기의 야심에 밀린다면 이 오점이 모든 덕성을 오염시켜 하나님의 후의를 완전히 잃게 만들기 때문에, 세속 인간들의 미점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열의가 없으면 정직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열의가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리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은(11:2) 실로 지당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며, 이 두려움은 지혜의 근본인 것이다(111:10).

 

5.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지만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움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 이런 움직임은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시초가 되며, 성경은 이 전향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돌린다(31:18). 의지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으로, 선을 결심하면 이익이 되고 악을 결심하면 손해가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결심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악을 결심하는 것은 부패한 본성이 하는 일이며, 선을 결심하는 것은 은총이 하는 일이라고 베르나르두가 가르친 것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을 끌려들거나 인도된다고 말하는 나를 너무 지나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필연과 강제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싫어한다. 이 구별의 중심점은, 사람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했을 때에,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지 마지 못해서 또는 강제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심정의 가장 간절한 욕구에 의한 것이지 힘에 이한 강제로 인한 것이 아니며, 그 자신의 정욕의 선동으로 한 것이지 외부로부터 강요를 받아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르나르두스의 글에도 어거스틴의 생각과 같은 것이 있다. “우리는 다른 멍에의 압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원적 노예 상태의 멍에를 멘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웠던 의지가 스스로 죄의 종이 된 것이니, 노예인 점에서 우리는 가련하고 의지에 관해서는 변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영혼은 어떤 이상하고 악한 방법으로 일종의 자원적이며 그릇 자유로운 필연성에 지배되며, 동시에 노예이며 자유롭다. 필연성 때문에 노예이며 의지 때문에 자유롭다. 그리고 더욱 이상하고도 한탄스러운 것은, 자유롭기 때문에 영혼은 유죄(有罪)하고, 유죄하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의지의 전환은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주신 은총의 결과이다. 6-14)

6.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속 사업에서 나타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행하시는 일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성의 부패를 시정하며 치료하는 방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사도가 빌립보 사람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1:6) 했을 때에, 그 말은 착한 일의 시작이 전향(轉向=回心)의 맨 처음임을 의미하며 그 처음은 의지에 있다는 것을 뜻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돌 같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살 같은)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36:26-27). 사람의 의지는 전적으로 개조되며 갱신되어야 하는 것일진대, 어느 누가 감히 약한 의지를 하나님의 도움이 강화해서 선을 택하려는 효과적인 노력을 하게 만든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켜 바른 일을 열망하게 만드실 때에 돌이 변하여 살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말살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그것을 대신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의지는 말살된다. 나는 또한 의지가 새로 창조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의지가 지금부터 있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로 변한다는 뜻이다. 또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나는 단정한다(고후 3:5). 그러므로 나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약한 의지를 돕거나 부패한 의지를 시정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의지를 만들어 내기도 하신다고(“소원을 두신다) 한다(2:13). 이것을 볼 때에,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의지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모든 선한 일의 시초는 둘째 창조에서 오며(2:1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둘째 창조를 얻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증명하고 하였다(2:5). 이것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사람에게는 자랑할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7. 신자가 은총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먼저 의지를 움직인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보면, 모든 선행에는 은총이 먼저 작용하며, 의지는 은총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종자로서 그 뒤를 따른다는 말이 있다. 두 가지 점이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첫째로, 주께서 우리의 악한 의지를 시정, 아니 말소하신다. 둘째로, 주께서 친히 주님께로부터 난 선한 의지를 악한 의지와 바꿔 주신다. 은총이 의지를 앞지른다는 의미에서, 나는 사람의 의지를 수종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개조된 의지는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의지가 수종자가 되어 앞서가는 은총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의 공로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글에 의지가 없으면 은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은총이 없으면 의지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우리가 방금 바울의 말에서 본 바와 같이(2:13), 은총이 의지까지도 움직인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다. 인간의 의지를 은총의 수종자라고 한 어거스틴의 생각은 선행에 있어서 은총에 다음가는 임무를 의지에 배당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원의 제일 원인을 사람의 공로에 돌리는 펠라기우스의 극악한 주장을 반박하려는 것뿐이었다.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게 되도록 먼저 활동하시며, 원하게 된 사람의 결심이 헛되지 않도록 뒤를 따르신다고 어거스틴은 여러 번 말하지만, 모든 선행의 근본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8.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만이 선의 근원이라고 믿는 데는 쉽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리고 선으로 기울어진 의지는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원인은 사람 밖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는 바른 의지는 그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1:4) 그 기쁘신 뜻에서 흘러 왔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에는 비슷한 이유가 하나 더 있으니, 곧 선을 결심하여 행하는 것은 믿음에서 유래하므로 우리는 믿음 자체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포하므로, 충심으로 악으로 기울어지도록 태어난 우리가 선을 원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된다(36:26; 32:39-40; 11:19). 우리의 의지에 선하고 바른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뜻을 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개조되지 않은 우리의 의지에서는 선한 것이 생길 수 없으며, 개조된 후에도 우리의 의지가 선한 것은 우리 자신이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인이시라는 항상 같은 결론이 따르기 때문이다.

 

9. 우리의 축복의 시작과 계속과 결말이 하나님께로서만 온다는 것은 특히 성경에 있는 기도들이 밝힌다.

우리는 완고한 불복종으로 이끌리는 마음의 악한 동향과, 순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에 대한 시정이 대조되어 있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일시 은총의 인도를 잃었다고 느낀 다윗이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을 때에(51:10), 이는 자기의 마음이 불결한 것으로 속속들이 가득 차 있으며 자기의 정신이 부패하고 비뚤어졌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이 기도야말로 경건하고 거룩한 심성의 표정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한 반박은 어렵지 않다. , 다윗이 이미 어느 정도 회개를 했지만 이는 자기가 경험한 가련한 황폐 상태와 이전의 상태를 비교한 것이라는 간단한 반박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것 같은 자기가 다시 창조되며 사탄의 소유권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의 교만의 방자한 정도는 해괴망측하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15: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15: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포도나무 가지를 줄기에서 끊어 수분을 빼앗으면 싹이 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체로는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의 본성에서 선을 행할 가능성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는 결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자립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며 최소한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조차 일체 배제하신다. 그리스도의 뜻은 간단명료하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선한 일도 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서 떨어질 때 우리는 마르고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행의 처음 부분은 결심이며 다음 부분은 그것을 성취하는 강한 노력이다. 그리고 두 부분은 모두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의지를 만드신다고 하면 의지에 있는 선은 모두 우리의 밖에 있게 된다. 그러나 선한 결심까지도 우리의 무거운 육에 눌려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이 곤란한 싸움을 이기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력이 공급되며 이것은 뜻을 이루는 데 충분하다고 사도는 덧붙여 말한다. 다윗도 주의 진리에 행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한 다음에, 곧 이어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첨가한다(86:11). 이 말씀은, 심정이 바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마음이 산란하여 견인(堅忍)의 힘을 얻지 못하면 곧 사라지거나 타락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행을 시작하시며 또 완주하시는 것이다. 의지가 바른 일을 사랑하고 열렬히 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려고 분발하며 움직이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선택과 열심과 노력이 흔들리지 않고 성공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나, 끝으로 이 모든 일을 사람이 꾸준히 계속하며 최후까지 견인불발하는 것도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10.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가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첨가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시는 모양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가르치며 믿어 온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신 후에 거기에 대한 복종이나 항거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했으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지의 방향을 효과적으로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이끌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라고 크리소스톰이 자주 반복한 이 말을 물리쳐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시고 우리가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아직 정직한 상태가 남아 있었을 동안에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서 결심하시며 역사하실 없다면 자유 의지가 얼마나 가련한 것인가를 사람이 실지로 분명히 보여 주었으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 이렇게 적은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희미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도가 가르치는 것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선한 의지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모두 그 사랑이 제시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 사랑을 구하게 되는 것은 하늘 은총의 입김이 불어 주신 사람들뿐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찬양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되어 하나님의 인도로 움직이며 주관된다는 것은 분명히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다. 이런 이유로, 결심한다는 행동의 일부는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어거스틴이 조롱하는 것은 정당하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고 한다(요일 3:9). 여기서는 굳은 지조가 효과적으로 견인불발의 의지를 낳는다고 단정하므로, 궤변가들이 몽상하는 중간적인 움직임-, 사람이 자유로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하는 중간적인 움직임-이 분명히 배제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1. 견인(堅忍)은 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서 결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보충이 아니다.

사람이 처음 은총을 받아들이는 동안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견인이 분배된다고 하는 이 오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멸시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의 이런 견해를 일소할 때에 처음의 견해 또한 자연 무너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 종들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기쁘고 좋은 것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일을 더 큰 은총을 더하여 계속할 만한 것으로 보셔서, 매일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쌓아 올려 그들을 풍부하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무릇 있는 자는 받게 되리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25:39; 19:26; 25:21, 23; 19:17).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을 경계해야 한다. 첫째로, 처음 은총을 합당하게 사용한 데 대한 상급으로 후에 은총들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효과를 나타내게 만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급을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은총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신자들이 먼저 받은 은총을 선용할수록 뒤에 따르는 은총이 더욱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선용하는 것 역시 주님께로부터 오는 일이며, 상급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은혜에서 오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따라서 의지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은 전연 없는 것이다(2:13). 여기에 대하여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대부분 우리가 처음 은총을 받은 후에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그 뒤에 오는 은총과 협력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내가 대답을 한다면 그들이 주님의 권능으로 일단 의에 복종하게 된 다음부터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 전진하며 은총이 하는 일을 따르는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하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성령께서 처음에 복종하는 심성을 만드시고, 다음에 그것을 함양하며 그 지조를 더욱 강화시켜 견인불발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12.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사람은 단 한 가지 선행도 자기에게 돌릴 수 없다.

무지한 그들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고전 15:10) 자기들의 뜻에 맞도록 곡해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이 발언을, 자신을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낫다고 말하면 너무 교만하게 들릴 것 같았기에 바울은 그 공로를 하나님의 은총에 돌림으로써 자기의 발언을 시정했다고 해석했다. 사도는 주의 은총이 자기와 함께 수고해서 자기를 동역자로 만들었다고 쓴 것이 아니라, 수고한 공로를 전부 은총에만 돌리는 의미에서 이 수정을 한 것이다. “수고한 것은 내가 아니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모호한 표현 때문에 그들은 속았고, 특히 라틴어 번역이 졸렬해서 히브리어 관사(冠詞)의 표현력을 잃어버렸다. 만일 축자적으로 번역한다면, 그는 은총이 자기의 동역자였다고 말하지 않고 그에게 있는 은총이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이 점을 분명하게 그러나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원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게 되도록 은총이 그를 앞지르며(59:10), 원하는 사람의 소원이 헛되지 않도록 그의 뒤를 따른다(23:6).” 베르나르두스도 어거스틴과 같은 생각으로 교회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제가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저를 이끌어 원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걸음이 느린 저를 이끌어 달리게 만드소서”.

 

13. 어거스틴도 사람의 의지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참으로 어거스틴은 주께서 사람들 자신의 의지를 써서 그들을 이끄시지만, 그들의 의지는 이미 하나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받거나 거절하거나 자유로 선택하도록 은총을 제시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그 선택과 결심을 다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은총이며, 그래서 거기에 따르는 선행은 은총의 결과와 결실이다. 그리고 은총에 복종하는 의지는 은총이 만들어낸 의지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우리의 모든 선행을 실현하는 것은 은총뿐이다라고 말했다.

 

14. 어거스틴은 사람의 의지를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총에 의존시킨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은총은 의지를 제거하지 않고,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며, 선한 의지를 돕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은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 끌려가듯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감동을 받아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행동은 일일이 은총이 필요하며, 은총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며, 그래야만 은총이 참으로 은총이 된다는 것을 펠라기우스가 인정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발렌티누스에게 보내는 책망과 관용이라는 책 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같은 그 은총에 의해서 기쁨을 받으면 사람의 의지는 지속(持續)하게 되며, 불굴의 용기로 강화되며, 은총의 지배를 받는 동안은 결코 멸망하지 않지만, 은총에게 버림을 받으면 즉시 패망한다. 주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의해서 선으로 전향하며, 일단 전향하면 끝까지선에 머무른다. 사람의 의지가 선을 향하게 되는 것과 방향이 정해진 후에 선에 머무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며, 사람의 어떤 공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자유 의지라고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의지는 하나님께로 전향하거나 머무를 수 없으며,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은총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인희의 책요약

한인희의 책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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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16장 하나님의 섭리 더락 2022.08.03 115
35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17장 섭리적 신앙 더락 2022.08.09 103
34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18장 유기된 자에 대한 섭리 더락 2022.08.12 102
33 기독교 강요- 2권: 복음이란?/ 1장 원죄 더락 2022.08.27 103
32 기독교 강요- 2권: 2장 노예의지. 1~17항 더락 2022.09.07 99
31 기독교 강요- 2권: 2장 노예의지. 18~27항 더락 2022.09.07 124
» 기독교 강요- 2권: 3장 중생. 더락 2022.09.16 115
29 기독교 강요- 2권: 4장. 하나님의 사역과 심정 더락 2022.09.20 97
28 질문하는 십대, 대답하는 개혁신학(2) file 더락 2022.09.21 108
27 질문하는 십대, 대답하는 개혁신학(1) file 더락 2022.09.21 99
26 죄 죽임-존 오웬. 해제 file 더락 2022.09.22 127
25 죄 죽임-존 오웬. 1부 죄 죽임 file 더락 2022.09.23 114
24 죄 죽임-존 오웬. 2부 죄 죽임의 의무 file 더락 2022.09.24 115
23 죄 죽임-존 오웬. 3부 죄 죽임의 본질 file 더락 2022.09.24 114
22 죄 죽임-존 오웬. 4부 죄 죽임을 위한 일반적 지침 file 더락 2022.09.24 117
21 죄 죽임-존 오웬(5). 5부 죄 죽임을 위한 개별적 지침(1) file 더락 2022.09.28 122
20 죄 죽임-존 오웬(5). 5부 죄 죽임을 위한 개별적 지침(2) file 더락 2022.09.28 158
19 죄 죽임-존 오웬(5). 5부 죄 죽임을 위한 개별적 지침(3) file 더락 2022.09.28 173
18 죄 죽임-존 오웬(6) 6부. 죄 죽임의 수단 file 더락 2022.09.30 162
17 기독교 강요- 2권: 5장. 자유의지에 대한 논박(1) 더락 2022.12.06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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