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
(사람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해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하신다고 한다. 1-5)
1. 사람은 악마의 세력 하에 있으며, 참으로 기꺼이 그를 따른다.
사람이 죄의 멍에를 메고 노예가 되어 자기의 본성만으로는 선을 사모하여 결심하거나 선을 추구하여 노력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이 증명했다. 또한 우리가 강제와 필연성의 차이를 지적했지만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나 역시 자진해서 짓는 것이다. 동시에 사람이 악마의 종으로 매여 사는 동안, 자기의 뜻보다 악마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 더 많은 것 같다.
자연인의 의지는 악마의 세력에 예속되어 그 선동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히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노예들이 싫으면서도 복종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지는 싫어서 반항하면서도 악마의 명령을 듣도록 강요를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반대로, 사탄의 간계에 사로잡혀 있는 의지가 필연적으로 항상 시키는 대로 순순히 복종한다는 뜻이다(고후 4:4; 엡 2:2). 불경건한 자들의 눈이 먼 것과 이로써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사탄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죄악의 원인을 사람의 의지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의 의지에서 악의 뿌리가 솟아나며, 사람의 의지가 사탄의 나라의 토대 즉, 죄의 토대가 된다.
2. 같은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역사한다.
욥의 사건을 통해 보자. 갈대아 사람들은 욥에게 큰 재난을 가했다. 그의 목자들을 죽이고 양떼를 약탈해 갔다(욥 1:17). 그들의 행동이 악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며, 모든 일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욥 1:12) 이 사건에서 사탄이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욥 자신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갈대아 사람들이 약탈한 것은 하나님이 가져 가신 것이라고 말한다(욥 1:21). 이 부분의 해결은 쉽다. 주의 목적은 재난으로 자기의 종의 인내심을 단련하려는 것이었고, 사탄은 욥을 절망 상태에 몰아 넣으려고 애썼고, 갈대아 사람들은 법과 공의를 어기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이익을 보려고 했다. 목적이 아주 다른 것이 벌써 행동의 특색을 뚜렷이 나타낸다. 그러므로 같은 행위를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에게 돌리는 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으며, 목적과 방법을 구별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아무 흠 없이 빛나며, 사탄과 사람의 추악한 행동이 그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
3. 마음이 “굳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교부들은 이 사실을 단순하게 인정하는 것을 신중히 회피하는 때가 있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경한 말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경한 말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신중한 태도를 나는 충심으로 칭찬하는 동시에 우리가 단순히 성경의 교훈을 지킨다면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지나 허용으로 도피하는 동안은, 이 역사의 성격은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발생한다고 대답한다. 첫째 방법은, 하나님의 광명이 제거되면 암흑과 맹목 상태만이 남는다. 그의 영이 제거되면 우리의 마음은 돌과 같이 굳어진다. 그의 인도가 없어지면 우리의 마음은 비틀리고 구부러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보며 복종하며 바르게 따르는 능력을 빼앗으실 때에, 하나님이 그들의 눈이 멀며 마음이 굳고 비뚤게 만드신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방법은 이 말들이 원래 가진 뜻에 훨씬 더 가깝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진노의 실시자인 사탄을 시켜 자기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서 뜻대로 사람의 목적을 정하며 의지를 격발하며 노력을 강화하신다.
4. 성경에서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대하시는 실례
첫째 방법과 관련된 성경 말씀(욥 12:20; 겔7:26; 욥 12:24; 시107:40; 사 63:17).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것보다, 그들을 버리심으로써 그들을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 만드시는가 하는 것을 알린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범위를 넘은 증언도 있다(출 7:3-4, 4:21, 10:1, 10:20, 27, 11:10, 14:8). 주께서 바로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시지 않은 것이 곧 굳게 만드신 것인가? 주께서는 바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셔서 그 강퍅한 마음이 아주 굳어져 버리게 하신 것이다. “내가 그의 마음을 억제하리라”(출4:21)고 말씀하신 것은 이 뜻이다. 모세도(신2:30), 예언자도(시105:25) 동일하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못하게 되어서 범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을 “완강하게 만드셨다”, 또 “변하셨다”고 한즉, 이것은 계획적으로 그들을 굽혀서 그런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백성의 죄를 벌하려 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버림받은 자들을 통해서 실행하셨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은 도구에 불과했고, 실행하는 권한은 주님께 있었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참고, 사 5:26, 7:18; 겔 12:13, 17:20; 렘 50:23; 사 10:15).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은 이 문제의 뜻을 잘 밝혔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는 일이다. 그들이 죄 가운데서 이런 짓 저런 짓을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권능에서 유래한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암흑을 나누시기 때문이다.”
5. 사탄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주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섭리로 여러 가지 목적에 배정하실 때마다 사탄이 개입해서 그들을 선동한다. 이 점을 증명하는 데는 한 구절만 인용해도 충분할 것이다(삼상 16:14, 18:10, 19:9). “여호와께서 부리신 악신(악령)”을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불결한 영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영이 스스로 자신의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응해서 하나님의 한 도구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류와 유혹이 역사하는 것은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거짓을 믿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살후 2:10-11).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악한 도구들을 손에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셔서 자기의 공의에 이바지하게 하신다. 악한 그들은 행동함으로써 그 부패한 본성이 생각한 악한 일을 실현한다.
(외형적인 일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뜻을 이긴다. 6-8)
6.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행동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본다면, 하나님이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시는 대로 사태가 벌어질 뿐 아니라, 사람의 의지도 같은 목표를 향하여 기울어진다. 우리는 결심 자체도 하나님의 특별한 자극에 좌우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가장 귀중한 기명들을 모두 빌려주었는데(출 11:2-3), 누가 그들의 마음을 그렇게 기울게 만들었는가? 결코 자진해서는 그렇게 기울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들 자신의 지배를 받았다기보다 주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신탁(神託)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압살롬의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삼하 17:14) 르호보암이 소년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왕상 12:10, 14) 전에는 용맹하던 민족들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떨게 만든 것은 누구였는가? 기생 라합까지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했다(수 2:9 이하). 또 이스라엘 백성을 공포심으로 낙심하게 만든 것은 율법서에서 “그들의 마음으로 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ㅂ누이 그분이 아니고 누구였는가?(신 28:65)
7.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지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길을 트고자 하실 때마다 외면적인 일에서까지도 사람들의 의지를 굽히며 돌리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자유를 지배하지 못할 이만큼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도 하나님의 고무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즉 가장 단순한 일을 판단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으며 쉬운 일에서조차 용기가 나지 않는 것에 반해 가장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지혜가 생각나며, 결정적인 중대한 문제에서 모든 어려움을 배제할 용기가 생긴다. 이런 의미로 나는 솔로몬의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고 한 말을 이해한다(잠 20:12). 그는 귀와 눈의 창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주신 그 기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다. “성경을 착실히 연구하면, 하나님이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만드시고 선하게 된 의지를 선한 행동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므로, 선한 의지들은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보존하는 의지들까지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지들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기울어지게 하신다. 혹은 은혜를, 혹은 벌을 주시려고-그리고 참으로 가장 비밀한, 그러나 가장 공정한 판단에 의해서-기울이시는 것이다.”
8. “자유 의지”라는 문제는 우리가 결심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 결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는 점이 있다. 사람의 자유 선택의 능력은 사태의 결과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는, 외부의 방해가 있더라도 사람이 결심한 일을 모두 실현하며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점에서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경향이 자유로우냐고 묻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이것이 기독교 강요다“의 저자인 라은성 교수의 책 내용과 설명으로 보충한다.
책 내용.
「인간의 의지가 속박되어 있다는 것은 원하는 대로 만사가 일어나지 않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의를 논할 때 인간이 외적인 방해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자 결정한 것마다 수행하고 완성하고자 허용되느냐를 묻지 말고 자유로운 판단의 선택과 자유로운 의지의 성향을 갖고 있느냐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강요다”(PTL) p.277
설명.
『중생된 사람의 자유의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는 의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할 때에 “A를 택해야 할까요, B를 택해야 할까요?”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내가 옳은 것인가?”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즉 내가 하나님 앞에 갖고 온 것을 가지고 이거 할래, 저거 할래 하지 말고 “주님,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A와 B 두 개를 갖고 왔는데 그것 외에 C가 있습니까?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에 우리의 의지가 지속적으로 의지하려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그분의 의지에 따라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을 가져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