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 죄 죽임을 위한 개별적 지침(5)
9. 죄로 인해 마음이 불안하게 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는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영혼에게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라
이 지침을 지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지침을 지키지 못해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 근거 없이 스스로 평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맞서 우리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는 자에게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중에서 구원하실 자들을 주권적으로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며, 자신이 기뻐하는 자들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자신이 기뻐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롬9:18). 하나님은 임의대로 자신의 모든 자녀에게 이 위로를 꺼내 주십니다(고후1:3).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과 패역을 고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 위로의 특권이 특별히 자신의 것임을 강조하십니다(사57:16-18).
2) 양심에 평안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기뻐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처럼, 자신이 기뻐하는 자의 양심에 평안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독점적 특권입니다. 거짓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전혀 그렇지 않는데도 스스로 평안하다 말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실 때, 주님은 자신을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계3:14)이라 칭하십니다. 주님은 이 이름으로 우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솔직히 증언하십니다(사11:3). 곧 우리의 외모를 따라 또는 실수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실에 따라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들이 스스로 평안을 말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사람들은 죄에 대해 혐오감을 갖지 않고 스스로 평안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죄로 인해 상처를 입어 불안하거나 괴롭게 될 때,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지 않고서는 절대로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언약의 약속들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죄는 잘 처리되었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 수 있을 만큼 그분을 높였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죄와 죄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혐오감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 스스로의 치료법이지 하나님의 치료법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없이는 치유나 평안이 주어지지 않음을 알고 “그들이 찌른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정말이지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슥12:10). 그들은 그리스도를 찔렀던 죄를 혐오하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통곡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침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믿음은 그리스도를 특별히 찔림 당한 자로 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치유와 평안을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 특히 언약의 피 곧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게 됩니다(사53:5). 우리가 치유를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채찍에 맞는 그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는 지금, 만약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그리고 신자들에게 부어 주신 성령의 역사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면, 치유와 평안을 필요로 하는 죄나 죄들을 당연히 크게 혐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고후7:11; 욥42:6). 욥은 치유받기 위해 자기혐오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시편 78편 33~35절에서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에게 평안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건전하고 지속적인 평안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평안은 새벽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에 한 마디도 평안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평안을 얻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 그들은 빈말을 했기 때문입니다(37절). 평안하다고 말했을지라도 그에게 상처를 주고 불안의 원인이 되었던 죄를 혐오하고 싫어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아니고 그가 스스로 날조한 평안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불쌍한 영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에게 자비를 구하지만, 혀 밑에 달콤한 죄의 사탕을 감추어 놓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자들은 참되고 견고한 평강을 누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혼을 치유하고 양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 죄 자체를 철저히 미워하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는 더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동안 하나님과 각별한 교제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과 자기들의 죄는 이제 갈라섰다고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자기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자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살펴보면, 처치했다고 생각했던 죄악이 은밀하게 남아 있습니다. 적어도 절대 필수적인 죄에 대한 철저한 혐오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념과 합리적 원리들에 의존함으로써 자기들에게 거짓 평안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영혼 사이의 관계는 모두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그는 빛을 소유하고 있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 과거에 자기 영혼이 어떻게 고침 받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적용해야 할 외적 수단으로 간주하고,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 약속들을 뒤져서 문자적 표현들이 자신의 상태에 직접 부합되는 말씀들을 몇 가지 골라 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나님은 이 약속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기서 내 상처를 덮을 만한 크기의 고약을 발라야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약속의 말씀을 자신의 상태에 적용시키고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까이는 계시지만 그 안에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지성적, 이성적 영혼의 단순한 작용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든 안 하든, 곧 그 말씀에 생명과 권능을 불어넣으시든 안 넣으시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주 하나님이 평안하라고 말씀하시는지 여부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고 가련한 피조물이 평안을 빼앗겨 평안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시고 새로운 판단의 자리로 자기를 부르실 때 곧 하나님이 손으로 자기를 끌지 않으시면 발자국을 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때를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질문. 우리가 어떻게 홀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성령과 동행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가?
답변1. 만일 우리가 이런 일로 길에서 벗어나 있다면, 하나님은 신속하게 그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시25:9). 하나님이 항상 잘못 되도록 놔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벌거벗은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리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그 잎을 벗겨 내어 그 속에 있는 모든 평안을 제거하며, 그 보호대에 안주하는 것을 막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보통 기다림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기다림은 은혜로서, 하나님이 이런 상태에서 보기 원하시는 특별한 믿음의 활동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의 집을 뛰쳐나와 달려갈 때 잠시 그 문에서 지체하도록 하시고, 즉시 자기 앞에 붙들어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너무 부끄러워 감히 자기에게 달려오지 못할 때 손으로 그들을 낚아채 안으로 끌어당기십니다.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는 자들 곧 스스로 평안을 말하는 자들은 보통 다급합니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습니다(사28:16). 설상가상으로 이런 과정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악을 고치지 못하며 악한 기질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도록” 영혼을 이끌고 지킵니다(시85:8). 하나님이 평안을 말씀하실 때, 참으로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속에는 영혼을 더 이상 그릇되게 다루지 않아도 되는 강력한 은혜가 포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눅22:32).
(3) 사람들은 평안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평안을 말한다.
참으로 그렇습니다(렘6:14). 이런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상처를 고치는 일을 아주 사소한 일로 만듭니다.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한번 바라보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줄로 생각하고 거기서 그만입니다. 바울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고 말합니다.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는, 말씀에 믿음이 섞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믿음이 섞여 있으려면, 약속 안에 들어 있는 자비의 말씀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말씀의 참된 본질 속에 합체될 때까지 배합되어야 비로소 영혼이 유익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성급했습니다. 약속의 능력이 영혼 속으로 스며들 정도로 약속을 믿음에 버무려 먹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가볍게 그 일을 처리하고 말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상처가 다시 도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4) 누구든 어떤 죄에 대해 이제는 평안하다고 선언했는데, 하나님이 처리하시지 않은 중요한 다른 악을 영혼 속에 갖고 있다면, 아무리 평안을 선언해도 평안은 없다.
어떤 사람이 한 의무를 계속 등한시했습니다. 철저히 모든 의를 실천하는 가운데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양심은 혼란에 빠졌고 영혼은 상처를 입었으며 그 죄로 인해 뼛속까지 불안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치료에 나섰고, 거기서 평안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하나님의 영을 크게 근심시키는 세속화, 교만 또는 다른 미련함이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악들은 그를 괴롭히거나 그가 악들을 건드리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평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from) 의롭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in) 있는 죄는 절대로 의롭게 여기시지 않습니다(합1;13).
(5)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양심이 평안하다 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에 그들이 겸손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평안은 다윗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평안이요 마음을 녹이는 평안입니다(시51:1). 나단이 하나님의 용서의 소식을 갖고 왔을 때 다윗이 보여 준 것만큼 깊은 겸손은 없을 것입니다.
질문1. 우리는 ‘언제 특정한 상처와 관련하여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약속의 위로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붙들 수 있는가?
답변. 첫 번째 대답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이고, 언젠가 됐든 조만간에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즉시 말씀하실 수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그때를 더 오래 기다리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늦든 빠르든, 죄를 짓는 때든 회개할 때든, 우리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든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말씀하시면,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질문2.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이 평안을 말씀하시는 때를 알 수 있는가?
답변. 하나님이 평안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확신이 들 때가 바로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알아듣는 은밀한 본능이 믿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눅1:44). 그리스도는 “내 양들이 내 음성을 안다.”(요10:4)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내 음성을 알고 있다. 내 음성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고, 신랑과 교제하는 데 아주 익숙했기 때문에 즉시 신랑을 알아봅니다(아5:2). 그리스도는 말씀하실 때 결코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씀하지 않고 권능으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런저런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실” 것입니다(눅24:32). 그리스도는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어서”(아5:4)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곧 자신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 우리를 사로잡으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 영혼에 유익하다면, 그 말씀이 겸손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며, 약속의 목적에 합당하다면 즉 사랑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며, 마음을 녹이고 순종하게 하며 자기를 비우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