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롤링배너1번
한인희의 책 산책
조회 수 187 추천 수 1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20220316_155134.png

박영돈 지음 | IVP | 2011년 02월 16일 출간

 

1장 뒤틀린 성령의 음성

직통계시를 받는 사람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성령의 근본적인 사역이 무엇이며, 그 사역의 특성과 패턴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성령은 자유하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하시지 않는다(16:14). 그러므로 어떤 영적인 현상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를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이다.

 

 

천국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요즘 입신하여 천국에 다녀온다는 이들이 많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주님의 말씀을 뒤집어엎는 것이다(16:27-31).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계시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믿게 하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밝혀진 주님의 뜻이다. 이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이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어떤 증언을 들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예언자인가, 점쟁이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내일 일과 염려는 다 주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험보다는 우리의 앞날을 미리 아는 안전을 원한다. 이것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미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도록 우리 휘하에 두고 싶어 하는 교만의 발로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자유를 보장해 주시고 믿음과 소망의 삶을 살게 하셨다. 우리 앞에 미래를 열린 상태로 놓아 두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춘 우리의 비전과 갈망에 의해 미래를 빚어 가게 하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마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자유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미래를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책임 있게 우리의 자유를 활용한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될 수 있다.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최근 들어 한국 교회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예언 훈련 학교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또는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 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꼭 얘기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이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나 인상이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솔직하고 진실한 태도이며 많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시는 성령

하나님은 낙심하여 탈진한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호렙산에서 그를 만나 주셨다.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지만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었지만 불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니 불 후에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다(왕상 19:11-13). 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적보다 사람들에게 거의 인지되지 않을 정도로 세미한 음성을 통해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교훈을 엘리야에게 그리고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복음의 세미한 음성 가운데 역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복음의 세미한 음성은 무력해 보이거나 미련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기적이나 표적도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했던 것을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의 복음의 부드럽고 세미한 음성은 녹인다. 이렇게 부드러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복시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래 참음과 기다림의 수고가 수반된다.

 

 

영적인 폭력

몇 년 동안 말씀을 열심히 전해도 교인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을 때 설교자는 지치고 탈진한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서서히 복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어간다. 그래서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놀라 까무러치게 하여 그들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려 한다. 그러나 오래 참음과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인간을 설복하시는 성령의 방법을 떠나 복음의 열정으로 가장된 육신의 성급함과 성취 지향적인 성향에 이끌릴 때 미혹의 영이 역사하기 쉽다.

 

 

성령의 약하심

성령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심으로 우리가 온전한 자유함 가운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많은 표적은 상대적으로 믿음의 약화를 수반한다. 그만큼 믿음의 필요가 줄어들고 믿음의 성숙할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교회에 변화되지 않은 교인들이 많은 것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증거이며, 그만큼 그분이 온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복음 사역자들은 비록 느릴지라도, 사역의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아도 정도(正道)를 따라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하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으로 일하는 것이다(20:19, 31).

 

 

 

 

2장 성령의 얼굴에 나타나는 수줍음

거룩한 수줍음

성령의 얼굴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거룩한 수줍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쏟는 사랑의 특성이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온전히 예수님만 드러내는 수줍음을 가지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특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셨다. 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마저 수줍어하신다. 성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분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그리고 아들 안에서 우리도 영화롭게 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신다. 자신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마귀의 특성이다.

 

 

성령의 원리인가, 무신론의 원리인가

성령 운동이 잘못되는 근본 원인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 부활의 영광과 능력만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성령 운동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옛 사람의 야망을 성취할 방편으로 교묘히 이용된다. 그런 성령의 운동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힘이 엄청나게 크다. 성령의 역사라는 이름을 교묘히 합리화되고 천사의 언어로 감쪽같이 은폐되어 인간의 이기적이고 마귀적인 욕망의 꿈틀거림을 감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이런 운동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세상의 가치관을 확산시키며, 성화보다 세속화를 가속화하는 운동으로 둔갑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 운동을 한다는 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다루는 불에 스스로 삼킴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성령 운동

성령은 신적인 인격이시다. 이것이 성령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식이다. 성령이 인격이 아니시라면 기독교 신앙은 붕괴된다. 구원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연합도 불가능해진다. 만일 성령이 단순히 능력이나 영향력이라면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효력을 전달하는 도구는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격을 중재하는 채널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 단순히 능력이라면 우리 안에 삼위 하나님의 내주는 불가능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적 신앙은 붕괴된다. 참된 성령 체험은 삼위일체 적 신앙을 교회 생활의 중심부로 복귀시킨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삼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하는 역동적인 예배와 삶이 회복될 것이다.

 

 

성령 체험의 삼박자

성령 체험의 본질적인 것은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과 교제다. 성령을 체험하면 삼위 하나님과 함께 나와 너를 체험하게 된다. 곧 하나님과 너와 내가 연합하는 천국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면 성부와 성자를 체험하는 동시에 나를 체험하게 된다. 곧 성령 안에서 담대해지고, 사랑과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해지고 행복해진 나,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된 새로운 나를 체험한다. 성령을 체험함으로 우리는 옛 자아의 실현이 아니라 죽음을 체험한다.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유일한 비결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면 나를 체험하는 동시에 또한 너를 체험한다. 지옥이 뒤틀린 관계에서 온다면, 천국은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온다. 이점을 간과할 때 성령체험은 개인주의와 영적 우월주의에 빠지기 쉽다. 성령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로 에워싸심으로 우주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성취하신다(1:10, 22-23).

 

 

 

 

3장 치유는 과연 하늘의 터치인가

필자는 몇 년 전부터 손 장로의 치유 집회에 관심을 가지고 그 집회에 두 번 참석했고 그가 쓴 책들도 읽어보았다. 손 장로는 응답을 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그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치유된 것을 확인하기 전에 먼저 믿고 선포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그는 믿음의 원리를 지나치게 확대 적용한 것이다. 주님의 뜻 안에서만 그 믿음의 원리는 통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 고침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병 고침의 은혜를 보류하시거나 안 주심으로써 더 큰 영적인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경우도 많다. 그런데 치유되는 것만이 주님의 유일한 뜻인 양 미리부터 치유하셨다고 못 박고 선포하게 하는 것은 치유되지 않는 신비에 담긴 주님의 뜻을 다 무시하는 것이다.

 

 

지금도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가

우리 교회는 은사 운동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더욱 문을 굳게 닫아걸기보다 오히려 은사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초자연적인 은사에 집착한 나머지 열매를 무시하는 경향은 배격해야 하지만 열매만을 강조한 채 은사를 평가 절하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열매와 은사가 모두 풍성한 교회다.

 

 

성경 시대의 치유

지금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확실한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신구약 성경에 걸쳐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되셨다. 치유는 처음부터 창조의 갱신이며 범죄한 인간을 회복하는 구원 사역의 중요한 단면이다. 구약에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으며 미래에 온전히 성취될 치유는 전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치유다. 예수님은 바로 이 구약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분으로 오셨다(4:17-19).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은 사탄의 세력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했다는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표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도 궁극적으로는 전인의 종말론적인 회복을 지향하며 예표하고 있다. 그러나 치유가 새 창조의 한 면으로서 이미 우리 안에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 시대의 치유와 오늘날의 치유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분이 전하신 복음의 진정성을 증명해 주는 표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적인 치유도 사도적인 권위와 메시지를 입증하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기에 사도 시대가 끝나고 성경의 계시가 종료됨과 동시에 이런 은사도 중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이런 의미를 띤 치유 사역을 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예수님처럼 메시아이심을 증명해 주는 완벽한 치유의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치유와 오늘날의 치유의 다른 점, 즉 불연속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함께 연속성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치유는 그분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이기에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교회와 선교지에 계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 중 누군가가 사도가 되거나 사도들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 오늘날에는 치유 기적이 잘 나타나지 않을까

오늘날 치유의 기사가 희귀해진 것은 교회가 처음 열심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제도적으로 경직되어가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게 되면 치유 기적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이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는 꼭 성령의 역사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교회의 발전 단계에 따른 순리적인 현상일 수 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는 신자들이 계속 외적인 표적을 추구하기보다는 말씀에 더 의존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는 성령의 섭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기적인가, 의술인가

저명한 기독교 심리학자이며 의사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약 또한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처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는 방법을 꼭 기적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의술이라는 방편을 통해서도 치유하신다. 눈부신 현대 의술의 발전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의료 행위와 성령의 은사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방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은 인위적인 것인 반면에,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고침받는 것은 신적이라는 이원론적인 사고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지금도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을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방법으로 생각하는 이적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침받지 못하는가

완전한 치유는 이 땅에 속한 지체를 벗어버릴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그때까지 우리 육체는 이 땅 위에서 불가피하게 약함과 질병과 노쇠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에 종속된다. ‘아직을 무시한 채 이미만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치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믿음 치유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러한 현상을 치유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는 한 설명할 길이 없다. 신자는 이미치유의 은혜를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지만 아직약함과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삶의 특성이다.

 

 

고쳐주시지 않는 신비

하나님은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 그분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육신의 질병을 통하여 우리 내면의 변화를 극대화하신다. 이 땅 위에서 잠시 질병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목적이 우리 안에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와 옛사람의 소욕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이며 우리 안에 행하시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영적인 사기

오늘날 치유 사역에서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성급한 주장과 선포로 추측과 소문만이 무성한 허상에서 빠져나와 진상을 직시하는 정직함과 투명함의 용기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성공한 치유 실적뿐 아니라 실패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보도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갖는 맹신의 헛된 기대와 환상을 깨뜨리고 진실에 뿌리내린 참된 신앙으로 인도한다. 치유 사역자가 이런 솔직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때 사람들이 그의 은사를 지나치게 과신하게 만들거나 그를 거의 신격화하는 화를 불러온다. 다시 말하면 실제 치유되기보다 치유되지 않는 사례가 훨씬 많다는 부끄러운 진실을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갖는 환상이 깨지게 해야 한다. 그것만이 사람들이 자신을 맹신하며 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치유 사역의 필요성

이런 치유 집회의 부정적인 면을 보면서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을 이성적으로만 제시하는 서구식 전도 방식만으로는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심령이 완악해진 사람들을 설복하기에 역부족일 때가 많다. 치유 기적은 이런 영적인 전쟁에서 악의 세력을 궤멸하고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전시하는 효과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치유는 교회 안에 있는 기존 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새롭게 인식하고 체험하게 하는 유익한 기능을 한다.

 

 

치유사역의 지침

먼저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성장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에, 치유의 은사도 반드시 이 목적에 부합되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 목사의 감독과 인도함을 따라 말씀의 통제를 받으며 겸손하게 은사를 활용해야 한다. 치유 사역은 미진한 말씀 사역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 있는 말씀 사역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부산물이어야 한다. 치유를 위해서는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동시에 치유되지 않는 신비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가르친다면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크게 문제될 일이 없다.

 

 

 

 

4장 방언은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

한국 교회를 다시 강타한 방언 열풍

한국에 방언 열풍의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하늘의 언어(규장)라는 책의 등장이다. 더불어 이런 추세에 저항하여 전통적인 신앙의 기치를 높이 든 이는 목사나 신학자가 아닌 김우현 씨와 같은 평신도였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부흥과 개혁사)라는 책은 김우현 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셨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택대학교이 김동수 교수가 방언에 대해 양극화된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라는 책을 펴냈지만, 애석하게도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기보다는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준 격이 되었다.

 

 

하늘의 언어

김우현 씨는 그의 책 하늘의 언어에서 방언이 이 시대 교회를 위해 예비하신 가장 강력하고 충만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라 역설한다. 방언을 성령 세례의 증거로 보았던 오순절 교회에서도 방언을 이렇게까지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다. 김우현씨의 책은 그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 제시나 기본적인 신학적인 논의가 거의 전무하다. 그는 성경의 큰 그림을 볼 줄 모른다. 김우현 씨가 말하는 방언 체험의 유익은 가히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단숨에 충만한 은혜를 받는 횡재를 바라는 영적인 요행 심리를 조장하여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으나 그들을 진정한 부흥으로 인도하기에는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 진리의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체험을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이단으로 가는 첩경이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신앙의 열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을 때 교회에 큰 폐해를 입힌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극단은 항상 또 다른 극단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에서는, 한국 교회를 강타하는 방언 열풍을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말씀을 향한 또 하나의 사탄의 공격으로 보았다. 옥성호 씨가 하늘의 언어가 무시해 버린 바울의 메시지에 다시 주목하며 방언 현상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려고 한 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은 지나치게 특정한 신학적인 전제, 은사 중지론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김동수 교수는 옥성호 씨의 책을 집중적으로 반박하면서 그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아마추어적인가를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신학을 전공한 프로답게 성경을 심도 있게 해석하고 자신의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 역시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는 김우현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우현 씨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의 책의 핵심 논지는, 방언은 하늘의 언어가 맞다는 것이다. 그의 해석이 대체로 원만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성경 말씀을 무시해 버린 김우현 씨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방언은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할 은사인가

김 교수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방언은 모든 신자에게 꼭 있어야 할 은사이며 온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사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방언 기도가 신앙 생활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결국 성경적 수준에 미달된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사는 셈이다. 그런 은혜의 방편이 없으니 어찌 영적으로 열등한 2등급 신자의 신세를 면할 수 있으랴!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성경적인 방언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은사중지론이라는 신학적인 전통과 방언에 대한 체험이다. 성경 어디에도 방언이 사라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초대교회의 방언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 유형에 가깝다.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이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조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다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견해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공중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해 대는 것을 삼가라는 권면이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주동하여 다른 이들에게 방언을 받게 부추기고 강권한 예나 그런 행위를 권장한 말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성경을 도외시하고 성령의 순리적인 역사하심에 배치되는 행위를 통해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하기 쉽다. 김우현 씨의 책에서는 방언이 단숨에 하늘 문을 열어 충만한 영적 세계로 도약시키는 마술과 같은 은혜로 과대선전 되었다.

 

 

방언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

방언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방언을 평가절하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방언의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인 인식과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누린다는 점이다(고전14:14-18). 그로 인해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믿음의 확신이 없는 이들이 방언을 체험함으로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신앙의 열심히 자극된다. 기도를 잘 안 하던 이들, 5분만 기도해도 기도할 것이 없던 이들이 기도를 자주, 오래 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영이 새로워지기도 한다. 방언하는 이들은 이 은사를 하나님이 주신 뜻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유용한 방편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한 아집을 내려놓고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겸손하고 진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5장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는가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나타난 놀라운 변화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 “물세례 말고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는가?” 성령 집회나 부흥회에서 심심찮게 듣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해온 이들은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그동안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고 배웠지만 실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성령 받은 증거가 너무 결핍된 것 같기에 그런 획기적인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된다. 성경은 한편으로는 오순절 전까지는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순절 이전 구약에도 성령이 계셨다고 증거한다. 이렇게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흐름의 성경 증거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하느냐가 우리 앞에 놓인 숙제다.

 

 

구약에도 계셨던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신구약 시대 전체에 걸쳐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하셨다. 이것이 오순절 전후 성령 사역의 동일성이다. 구약 시대에 역사하셨던 성령은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점에서 신약 시대의 성령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안고 있다. 또한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성령 사역은 오실 메시아와 그분을 통한 새 언약의 성취를 예언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이 사역하셨을 때는 육신의 예수님과 함께하는 성령으로 역사하셨다. 그 당시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제들과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육신의 예수님 안에 계셨고 그분을 통해 역사하신 성령을 체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순절이 이르기 전까지 아직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으신 성령은 누구이신가? 그 성령은 동일한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이제 구속사가 완성됨에 따라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영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함께하시는 영이 되셨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신 새 언약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영이시다.

 

 

지금도 성령의 불세례를 기다려야 하는가

오순절 전과 후의 성령 사역의 근본적 차이는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거듭났지만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완료되기까지는 부활하여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의 선물은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중생 후 성령을 받은 것은 그들이 처한 특수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옛 시대에서부터 새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에 서 있었다. 제자들의 성령 체험은 그들을 새 시대, 즉 교회시대로 진입시킨 시대 전이적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경험은 오순절 후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성령 체험의 정상적인 규범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문제는 오순절 전의 제자들처럼 아직 새 시대의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워서 이미 와 계신 성령의 영광과 그 은혜의 풍성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갈망하지 않으며 또 우리의 삶 전체가 성령께 주관되는 삶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다시 우리에게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돌이켜야 한다.

 

 

믿은 후에 성령 세례를 받은 사례가 있는가

오순절 후에도 믿은 후에 2차적으로 성령을 받은 사례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반박할 것이다. 어떤 이는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에베소에서 있었던 사건이 그것의 확실한 증거라고 말할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그들이 믿은 후 2차적으로 성령을 받은 것 같지만 문맥 속에서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분명 오순절이 지난 지 오랜 후에 존재했던 이들이지만 지금처럼 대중교통이나 매체가 발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던 자들이다. 여기서 누가가 특별히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은 믿은 후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새 시대가 도래 했고 신약 교회가 탄생하였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옛것을 따르던 남아 있던 무리가 마지막으로 신약교회로 편입되는 특별한 의미를 띤 사건에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 사건에도 기록되어 있다.

 

 

믿은 후에 성령을 받은 유일한 사례

사도행전에는 이 규범에서 벗어난 사례가 딱 한 군데 있다. 그것은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다(8:4-17). 이 사건은 특별히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구속사의 큰 틀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의 주역들은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겼던 이방인들보다 더 혐오하고 경멸했던 사마리아인들이었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사마리아에 예루살렘 교회와 상관없이 별도로 성령이 임하셨다면 초대교회는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어 서로 다른 전통과 배경을 주장하는 두 분파, 즉 예루살렘 파와 사마리아 파로 나뉘게 될 위험성이 다분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잠재적인 위험을 예방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해 그들의 기도와 안수를 통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게 하셨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교회를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고, 사마리아 교회를 그리심 산의 혼합주의 전통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순수한 구약 전통 위에 세우며,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고자 하신 것이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인식을 뒤집어엎으시고 그들이 경멸했던 사마리아인들을 합법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공표하며 확증해 주시는 중요한 의미를 띤 사건이다.

 

 

성령 세례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증거는 전무하다.

그러면 다른 서신서에서 이런 증거를 발견할 수 없는가?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는 것 자체가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전 12:3). 또한 그렇게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3:2).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이다(8:9).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의 가르침에도 바울의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들의 서신서에도 믿은 후에 성령 혹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언급이나 사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베드로 서신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의 성령 체험을 구심점으로 그의 복음 메시지와 가르침을 재구성하지 않았다. 그것은 베드로가 성령을 2차적으로 체험한 것은 그가 처했던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것으로, 더 이상 다른 이들이 따라야 할 규범적인 패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 교리가 이 시대에 유행하는 이유

이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영적인 현실이 불러온 변종 복음이다. 성령 세례의 가르침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성령이 거의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교인들을 겨냥한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이런 가르침은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 이 교리의 치명적인 약점은 한번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영적인 수준으로 변화되어 그 상태가 지속하리라는 잘못된 기대감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은혜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극적 은혜 체험이 영적 도약의 계기가 되고 대반전의 요인이 될 수는 있으나 우리의 영적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고 우리를 단숨에 영적인 고지로 끌어올려 영구히 거기 머물게 하지는 못한다.

 

 

전무후무한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

그렇다면 성경적 대안은 무엇인가? 현대 교회에 시급한 것은 성령 세례를 2차적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역사하심을 계속 거스르고 소멸하는 삶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2차적 은혜가 아니라 회개다. 현대 교회의 문제를, 교인들이 믿은 후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진단하는 가르침은 이러한 교회의 영적인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지도 못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가 아직 주어지지 않았으니 열매 없이 무력하게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6장 오순절로 돌아가는 길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

우리는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오순절 후에 살고 있지만 우리 개인의 신앙 역사 속에서는 아직 오순절을 맞이하지 못한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시급히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성령이 다시 강림하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이미 와 계신 성령께 우리가 돌이켜야 한다.

 

 

오순절로 돌아가는 길을 막는 새로운 십자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오순절에 이르는 길은 없다. 참된 성령 체험과 영적 부흥의 한복판에는 언제나 옛 자아가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지는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진정한 성령의 활동인지 아닌지는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판가름이 난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옛사람의 욕망은 기독교의 신앙을 변질시킨다. 종교적인 천재성을 타고난 이들이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잘 이용해 종교적인 야욕을 한껏 채우려는 음흉한 시도가 먹혀든 곳이 바로 한국 교회였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살 길은 옛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십자가가 우리 교회와 우리 삶의 한복판에 복귀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능력이 떠난 강단

교회 강단에 말씀의 능력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 전파자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 안에 먼저 옛사람을 죽이는 효력을 발휘해야만 그를 통해 능력 있게 역사한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의 필수 조건은 십자가의 죽음을 깊이 체험하는 것이다. 주님의 우선적 관심은 그의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그의 죽임이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와서 죽으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순절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자원하여 이 죽음에 동의하고 죽은 자로 살기로 결단하면 이 죽음은 빨리 끝난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들게 하는 성령의 바람

우리는 수많은 실패와 깨어짐의 아픔을 통해 아주 서서히 자기죽음의 자리로 기어 내려간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모두 사라지고 자아의 욕심과 야망을 쫓는 일에 넌더리가 날 때 또 옛 자아 중심적인 삶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그 삶이 고통스럽고 비참하게만 느껴질 때 그리고 자기 안에서 어떤 선한 것도 찾을 수 없다는 완전한 절망을 체험할 때 우리는 죽음을 승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받는 고난과 징계는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는 방편일 뿐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타격을 당해도 우리의 옛 자아는 깨지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만이 옛 자아를 깨뜨린다.

살았다고 하나 죽은 교회

마귀는 세상의 풍조와 유행이라는 덫을 쳐 놓고 낮잠을 자면서 인간들을 자신의 손아귀 안에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까지 이런 세상의 풍조와 가치관에 젖어 성장 제일주의와 물량주의에 매몰되었고, 양적인 성장을 자랑하지만 영적인 생명력은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현대 교회의 많은 성령 운동에는 부활의 영이 산출하는 열매는 나타나지 않고 미혹의 영이 장난치는 혼란스러운 현상과 광신이 난무하고 있다. 세상을 설복시키고 구원하는 능력은 거대한 건물과 수적이고 재정적인 위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을 이끌어 내시는 부활의 영, 즉 성령께 있다.

 

 

열린 하늘 체험

그러므로 성령 체험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체험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은 것이 우리 구원의 절정이다.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거기에서 발견해야 한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 마음에 그려 주신다. 성령이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는 진리를 우리 마음에 확신시켜 주실 때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열린 하늘을 경험하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하라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오순절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 은혜를 원하는 마음속의 깊은 동기가 복합적인 요인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목사가 평신도보다 이 은혜를 더 간절히 원하고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더 받기가 힘들다. 그것은 목사가 성령 충만을 구하는 동기가 그다지 순수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목사가 성령 충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인 동시에 성령 충만을 받기가 가장 힘든 사람이다.

목사들은 성공적인 사역을 위한 능력과 은사에 더 목마르고, 교인들은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한 행복감이나 황홀감에 목마르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보다 더 우선적으로 목말라야 하는 것은 우리의 전인격과 삶이 성령께 온전히 주관되는 것이다. 성령은 온유하신 분이시기에 강압적으로 우리를 지배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를 주관하시기 위해서는 자원하여 우리 자신과 모든 소유를 주님께 양도해야 한다.

성령은 목마르게 하는 생수이시다. 목마름 자체가 성령의 은혜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먼저 목마르게 된다. 목마름은 성령 충만의 앞부분인 셈이다. 그 뒷부분은 채워짐이다. 목마름과 채워짐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에서 한 짝을 이룬다.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은 계속 목마르면서 동시에 계속 마시는 행위다. 마치 매일 물을 마시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은 매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섭취하고 생수의 강이신 성령을 들이켜야만 한다. 주리고 목마름이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다.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성령 충만은 영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인정하는 개인과 교회만이 받을 수 있는 은혜다. 이 점에서 성령으로 충만하기에 자격미달인 교회가 많다. 만약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통해 큰 부훙의 역사를 일으키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갈 정도로 충분히 작고 연약하고 가련한 자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자만할 때가 아니라 입을 티끌에 대고 회개할 때이다. 외적 성장을 자축할 때가 아니라 내적인 타락을 애통해야 할 때이다. 만일 한국 교회가 외형적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고, 숫자와 조직과 재정의 위력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 충만하게 하시기에 충분히 작고 가난하고 애통해하는 교회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다시 부흥하게 하실 것이다.

 

 

 

 

 

 

<2011년에 고신 출신이면서 고신에서 교수로 재직하셨던 박영돈 교수님이 출간한 이 책은 성경적인 성령론이 무엇인지에 대해 쉽고 간결하면서 깊은 통찰로 쓰여 졌다. 개인적으로 신대원을 다닐 때에 선택과목으로 성령론을 한 학기 수강했던 적이 있는데, 이 책은 한 학기 강의 내용을 압축해놓은 것 같았다. 평소 성령세례, 성령충만, 방언 등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second blessing을 말하는 오순절 파의 주장과, third wave를 말하는 신사도 운동의 주장이 비성경적임을 논하면서도 동시에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들은 귀중히 여기고 성경의 지도를 따라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균형 있게 풀어냈다. 뒤늦게 읽었지만 지금에도 성령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목회적 통찰과 성령 충만한 신앙적 삶을 제공하기에 일독을 권한다.>

  • ?
    끝까지막내 2022.03.17 01:45
    특별히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second blessing을 말하는 오순절 파의 주장과, third wave를 말하는 신사도 운동의 주장이 비성경적임을 논하면서도 동시에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들은 귀중히 여기고 성경의 지도를 따라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균형 있게 풀어냈다. ->이대목이 참 와닿습니다. 일부 보수적인 고신교단은 지나치게 성령의 은사를 이 시대에서는 끝났다로 정의를 내려버릴때 힘들었었거든요. 이분의 책중에 일그러진 교회의 얼굴도 매우 좋은 책이었습니다.
  • ?
    아즈카라 2022.03.17 01:48
    사실 박영돈 교수님의 열린 성령론이 개혁주의 정통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음. 거의 무시하는 듯한 ㅋ 하지만 나도 개인적으로 박영돈 교수님의 책 내용을 지지함.

한인희의 책요약

한인희의 책요약

  1. No Image 12Jul
    by 더락
    2022/07/12 by 더락
    Views 101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13장 삼위일체 하나님(1)

  2. No Image 06Jul
    by 더락
    2022/07/06 by 더락
    Views 126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12장 경배와 예배

  3. No Image 06Jul
    by 더락
    2022/07/06 by 더락
    Views 160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10장 성경적 하나님, 11장 형상숭배의 불법성

  4. No Image 29Jun
    by 더락
    2022/06/29 by 더락
    Views 132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8장: 믿을 수 있는 성경, 9장: 직통계시

  5. No Image 29Jun
    by 더락
    2022/06/29 by 더락
    Views 150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6장: 안내자 성경, 7장: 성경의 권위, 성령

  6. No Image 21Jun
    by 더락
    2022/06/21 by 더락
    Views 129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5장: 그분을 믿지 않는 이유

  7. No Image 21Jun
    by 더락
    2022/06/21 by 더락
    Views 142 

    기독교 강요-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3장: 종교의 씨앗, 4장: 어리석은 신앙

  8. 기독교 강요- 기독교 강요 저술 목적/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1장: 두 지식, 2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9. 아더 핑크의 구원 신앙

  10. 설교에 맛을 더하는 예화 사용법

  11. 설교는 글쓰기다

  12. (여러 유형의 설교 준비를 위한) 깊은 설교 얕은 설교

  13.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4. 하나님과 팬데믹

  15. 박영선 목사의 욥기 설교-욥기의 주제는 욥의 인내가 아닙니다.(박영선 목사님 영상 링크)

  16. 존 스토트의 설교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
순위 닉네임 포인트
1위 하울림 64205점
2위 예배자 50913점
3위 엔돌핀 41405점
4위 로이 39110점
5위 하늘향기 27407점
6위 돌아온유다 18365점
7위 주정주정 12540점
8위 챨스 11745점
9위 산세리프 8735점
10위 동산위에 7745점


오늘ㅤ
457 / 502
어제ㅤ
545 / 684
전체ㅤ
492,764 / 1,842,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