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2권: 7장. 율법의 목적(2)

by 하늘향기 posted Dec 1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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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행악자들과 불신자들을 억제한다. 10-11)

10. 율법은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

율법의 둘째 기능은 적어도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일부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들이 억제되는 것은 속마음에 감동이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굴레를 쓰고 있어서 외면적인 활동에 손을 대지 못하며, 제멋대로 즐겼을 부패한 생각을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조금도 나아졌거나 의로워진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율법 자체를 극히 미워하며 입법자인 하나님을 저주해서, 될 수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없애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바른 일을 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실 때나, 하나님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때, 그들은 그 하나님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억제된 또 강요된 의는 인간 사회를 위해서 필요하다. 주께서는 만사가 소란·혼돈하지 않고 사회가 평온하도록 이런 방법을 마련하셨다. 사도는 디모데전서 19-10절을 통해, 율법은 육의 미친 듯한 정욕, 버려두면 한정 없이 뻗어 나가는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와 같다고 가르친다.

 

11. 율법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을 억제한다.

바울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라고 한 말은(3:24) 율법의 두 가지 기능에 다 적용할 수 있다.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두 종류 사람이 있다.

처음 종류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는 유덕하고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먼저 자기를 비우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이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그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한다.

둘째 종류의 인간들은 굴레가 필요하다. 그들이 육의 정욕이 날뛰는 대로 버려두어 의를 전연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을 굴레로 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상속시키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즉시 중생시키지 않는 때에는, 그들에게 찾아오실 때까지 공포심과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신다(참조, 벧전2:12). 하나님을 모르고 암중모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이 굴레가 되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경을 유지하다가, 드디어 성령으로 중생해서 충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

 

(율법은 주로 신자들을 훈계해서 선행을 촉구한다. 12-13)

12. 신자들도 율법이 필요하다.

셋째 용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중심적인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 용도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영혼 속에 사시며 주관하시는 신자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히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의 성격을 매일 더욱 철저히 배우며 확고하게 이해하는 데 율법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법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된다. 성도는 이와 같이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13. 신자를 위해서 율법을 전폐하려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죽음의 직분이 포함된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모세를 전적으로 집어 던지며 율법의 두 판을 버린다. 이 악한 생각을 우리의 머릿속에서 추방하라. 모세의 훌륭한 교훈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들 사이에서는 죽음만을 만들어내지만,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 좋고 훌륭한 이용법이 있다고 한다(32:46-47). 생활을 지도하는 영원불변의 표준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생활은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라고 한 다윗의 발언은(1:2) 한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세상 끝까지 적용된다.

율법이 요구하는 엄격한 도덕적 순결은 우리가 이 육체의 감옥을 쓰고 다니는 동안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율법을 무서워하여 도망하거나 그 교훈을 피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지금 우리에 대해 법의 요구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사법관인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그 완전성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일평생 애써야 하는 목표다.

 

(율법의 이른바 철폐는 양심의 해방과 고대 의식<儀式>들의 폐지에 관련된 일이다. 14-17)

14.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어느 정도로 철폐되었는가?

그런데 율법에는 신자들에게 충고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힘이 아니라, 권고를 반복해서 태만한 그들이 분기하게 만들며, 잠자는 그들을 꼬집어 자기의 결함을 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저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자 해서, 신자들에게는 율법이-즉 내가 말하는 도덕적 율법이-철폐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이 아니다. 율법은 신자들에 대해서 전과 같지 않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당황하게 만들어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며 파멸에 몰아넣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 가운데서 폐기된 것과 아직도 유효한 것을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주의 오심으로 인해서 율법 준수가 조금이라도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은 충분하고 확실히 말씀하신다(5:17-18). 그는 도리어 율법 위반을 고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의 교훈은 여전히 범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가르치며 경고하며 책망하며 시정함으로써 율법은 우리가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하며 준비시킨다(참조, 딤후3:16-17).

 

15. 율법은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바울이 저주에 대해서 하는 말은 계명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박하는 계명의 힘에 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한다(3:10; 27:26). 사도가 율법 행위에 속한자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에-우리를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하는 그 용서에-자기의 의의 근거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떤 속박을 의미하는가? 가혹하고 위험한 요구의 속박이다. 그것은 율법의 철저한 벌을 조금도 완화하지 않으며 어떤 범행이든지 반드시 처벌하고야 만다. 이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3:13; 21:23; 4:4-5).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고 했다. 슨 뜻인가?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끝없는 노예 상태에서 우리가 눌려 지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율법의 권위는 조금도 감해지지 않고, 우리는 항상 여전한 경외심과 복종심으로 율법을 받아들여야 한다.

 

16. 의식적(儀式的) 율법

의식들은 문제가 다르다. 의식들은 효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의식들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만일 그 의식들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의식을 정한 목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의식 준수가 무용할 뿐 아니라 또한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식은 그림자요 그 본체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2:17).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은(27:51),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10:1) 전에 희미한 윤곽만으로 시작했던 하늘 축복의 명백하고 살아 있는 형상이 이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 비록 속죄가 고대의 제사에서 참으로 약속되었고, 언약의 궤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증했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완전하고 영원한 안정성이 발견되는 그리스도의-은총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은 준수하지 않게 되었으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얼마나 유용했는가를 더 잘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의식들을 폐지하면서 자기의 죽음으로 그 효력을 확인하셨다.

 

17.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가 도말된다.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그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다짐하려고, 과거에 그들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고 가르친다(2:14-15). 그런 장애물은 의식들이었다. 유대인들을 주 앞에 성별한 결례와 제사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했던 것이다. 그 의식들을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2:14) 그뿐 아니라, 무슨 까닭에 우리의 구속(救贖)을 그 증서가 도말되었다는 사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시키는가? 그러므로 문제 자체가 우리에게 더 내면적인 것으로 인정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옳은 해석을 얻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글과, 사도의 분명한 말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경우에 그러하다. 곧 유대인들의 의식(儀式)에는 죄에 대한 대속보다 죄에 대한 고백이 있었다는 것이다(참조, 10:1이하; 16:21). 그들은 항상 자기의 죄와 불결에 대한 증서를 갱신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도의 글에 구약하에서 없어지지 않던 범죄가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에 속량 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9:15). 그러므로 사도가, 의식들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증서라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의 유죄와 불결을 공개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참조, 10:3).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같은 은총에 참가했다는 사실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총을 받았고 의식에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 교회를 다시 의식 준수의 의무로 얽어매려고 했을 때, 바울은 정당한 논거에 입각해서 의식의 궁극적인 목적을 심원한 말로 다시 규정하며, 골로새 신자들을 향해서 만일 이 모양으로 끌려서 의식적 율법에 예속된다면 그들은 어떤 위험에 도로 빠지게 될 것인가를 경고했다(2:16이하). 그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혜택을 빼앗기겠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영원한 속죄를 완수하신 후에 매일 준수하던 의식을-죄를 증거할 뿐이고 말소하는 데는 아무 공헌도 할 수 없는 의식을-철폐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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